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정근 (문단 편집) === [[제1차 세계대전]] 시기의 행적 === 1914년 러시아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연해주에 거주하던 한인 중에서는 러시아 군대에 입대하여 참전함으로서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고 실전경험을 풍부히 쌓아 후일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벌이려는 이들이 늘었다. 안정근 역시 일제의 마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동생 안공근과 함께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고 군대에 입대했다. 그는 위생장교로 임용되어 여러 전투에 참가했다. 한편 그는 대다수의 조선인들이 연해주에서 경제적 기반을 갖지 못해 가난에 허덕이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직접 벼농사 사업을 시도했다. 벼농사는 성공적이었고, 그곳에 이주한 한인 뿐 아니라 러시아인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발간한 <독립신문>은 연해주에서 벼농사를 성공적으로 이끈 안정근의 공적을 여러 차례 조명하기도 했다. 한편, 안정근은 1914년 6월부터 <권업신문>에 게재된 [[계봉우]]의 <만고의사 안중근전>의 관련 자료들을 제공해 민족의 자긍심과 독립의식을 고취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1918년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개최된 ‘조선정치망명자협의회’에 [[이동휘]], [[양기탁]], [[유동열]], [[이동녕]], [[김립(1880)|김립]], 박애 등과 함께 참석했고, 입헌 군주제적 입장에서 러시아 원동인민위원회로부터 후원만 얻자는 이동녕의 주장을 지지했다. 1918년 11월, 안정근은 중국 동삼성 길림에서 무오독립선언서에 발표될 때 대표 39명 중 한 사람으로서 서명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상하이에서 결성된 신한청년당으로부터 [[김구]]와 함께 이사에 피임되었다. 그는 자신이 신한청년당 이사에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자식들과 조카들의 교육을 위할 겸 상하이로 이주하기로 결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