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정근 (문단 편집) ===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 1909년 10월 26일, 친형 [[안중근]]이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다. 이때 안정근은 26세로 양정의숙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경시청 비밀보고문서 1909년 10월 31일자 기록에 따르면, 안정근은 성격이 온순하고 후덕하며, 매사에 신용이 있었고 천주교 신자로 일요일마다 프랑스 교회당에 다니고, 동급생 윤교신(尹敎信)과 교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그러던 중 형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뒤 여순 형무소에 수감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양정의숙을 자퇴하고 동생 [[안공근]]과 함께 친형의 옥바라지에 온갖 힘을 쏟았다. 그 후 사형 집행 하루 전인 1910년 3월 25일, 안중근은 두 동생 안정근, 안공근과 마지막으로 면회했다. 안중근은 이 자리에서 자신이 죽은 뒤 처리해야 할 일들을 당부했다. 우선 하얼빈에 가서 동지들과 함께 찍은 사진과 블라디보스토크에 소재한 이치권의 집에 맡겨둔 의복과 거사 전에 잘랐던 손가락(단지)을 찾으라고 당부했다. 안정근은 형의 시신을 여순 형무소 인근 언덕에 매장하고 귀국했다. 그는 맏형을 대신하여 가장 역할을 떠맡았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더이상 살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1910년 봄에 어머니 [[조마리아]]와 누이동생, 그리고 안중근의 유족과 자신의 가족, 동생 안공근의 가족들을 데리고 두만강을 건너 망명했다. 그는 처음에는 북만주로 갔다가 얼마 후 연해주의 니콜리스크로 이주했다. 그리고 1911년 단지 동맹원 백규삼에게서 잘린 손가락과 함께 혈서를 적은 태극기를 넘겨받았다. 그가 새로 거주한 니콜리스크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방 50리 지점으로 기후가 온화하고, 인심이 좋아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나 월경한 조선인들이 대거 운집해 살고 있었다. 안정근은 안중근의 친동생으로 명망이 높았고 인품이 후덕했기에 그의 숙소는 항상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거점이 되었다. 부인 이정서는 집안의 재정이 궁핍해지면 국경을 넘어 친정으로부터 자금을 조달했다. 안정근의 장모 왕재덕은 학교를 짓고 운영자금을 대는 교육지도자로 활동하면서도 사위를 위해 경제적 지원을 헌신적으로 해줬다. 안정근은 그 덕분에 망명지에서 조선인들을 결집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안중근의 장남 안분도가 독살당하는 등, 그와 가족에 대한 위협은 끈질기게 이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