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정근 (문단 편집) === 초년기 === 1884년 11월 15일 황해도 신천군 두라방 청계동(현 황해남도 신천군 석교리)에서 안태훈(安泰勳)과 조씨 사이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안정근은 14살 때 동생 [[안공근]]과 함께 세례를 받았고, 부친이 세운 신천군의 청계동 성당을 다녔고, 천주교 서적과 프랑스 신부를 접하면서 서양의 문물과 언어와 사상을 체험했다. 그는 청계동에서 천주교도로 지내는 동시에 한학을 수련하고 농사감독을 맡았다. [[흥사단]] 입회 이력서에는 안정근이 1892년부터 1900년까지 한문사숙에서 수학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안정근은 1910년 여순에서 심문을 받았을 때 형 [[안중근]]은 3~4년간, 자신은 7~8년간 한문을 배웠다고 밝혔다. 이는 안정근이 8~9세 때부터 10대 중반까지 청계동 서당에서 한학을 수련했음을 암시한다. [[김구]]의 [[백범일지]]에 따르면, 안태훈은 안정근, 안공근에게 글 공부하라는 훈계를 자주 내렸다고 한다. 또한 안중근은 사격술이 제일이었고 언제나 사냥을 다니고 있었고, 동생 안정근은 "붉은 두루마기를 입고 머리를 땋아 늘인 글 잘 읽는 도련님"이었다고 한다. 안정근은 1902년부터 1904년까지 자기 집안 소유 농토에 대한 농사간부를 맡았고, 진남포 이주 직전인 1905년부터 1906년까지 무역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장사를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는 1906년 봄 일족과 함께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을 떠나 황해도의 개항장인 진남포로 이주했다. 그가 진남포로 이주한 것은 동생들에게 신식교육을 시키고 자신은 상업에 종사하려는 안중근의 뜻에 따른 것이다. 안정근은 진남포에서 형제들과 함께 천주교계통의 삼흥학교를 설립하고 영어를 가르쳤다. 안중근은 교장을 맡았고, 그는 교사를 맡았다. 얼마 후, 그는 신천의 만석꾼인 왕재덕(王在德)의 고명딸 이정서와 결혼했고,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서울로 상경해 양정의숙(養正義塾)에 입학했다. 서울에 연고가 없던 안정근은 서부 봉상사 남문동에서 하숙생활을 하며 양정의숙에서 법률학에 전념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