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재홍 (문단 편집) == 생애 == 1891년 12월 30일 [[경기도]] [[수원시|수원유수부]] 종덕면 계루지부락(현 [[평택시]] [[고덕면(평택)|고덕면]] 두릉2리 계루지마을)에서 아버지 안윤섭(安允燮, 1866. 7. 1 ~ ?)과 어머니 [[광주 이씨]](1865 ~ 1946. 7. 10) 사이의 4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 집안 대대로 '근왕주의'를 추종하였던 분위기에 영향을 받고 [[사마천]]의 사기를 읽고 감명을 받아 '[[조선]]의 사마천'[* 안재홍은 정말 사마천처럼 한국 [[역사]] 통사서를 저술하려고 했지만 해방된 뒤 [[정치]] 활동을 하느라 저작이 고대사에서 그쳤다.]이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17세부터 본격적으로 신학문을 접하여 단발하고 [[성동고등학교|황성기독청년회학관 중학부]]에 입학해 졸업하고 1911년 21세의 나이에 [[일본]]에 유학하여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치경제과를 다니면서 책읽기를 즐겼다고 한다. [[민족주의]]적인 재일 [[유학생]]들 모임에서 활동하였으며 이 때 [[조만식]], [[송진우(독립운동가)|송진우]], [[장덕수]], [[이광수(소설가)|이광수]] 등과 교류하였고 유학생들의 이름, 주소, 번지를 줄줄 외우고 다녔다고 한다. 와세다대학을 다니다가 3학년 중에 휴학하고 [[상하이]]로 [[망명]]해 '동제사'에 가담하여 [[신채호]]와 교류하면서 민족주의 사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안재홍은 상하이에서 신채호를 만나 그를 존경하게 되었고 신채호-[[정인보]] 라인을 잇는 민족주의 역사가가 되었으며 조선일보 사장 시절에 신채호의 '조선상고문화사'를 연재하도록 하기도 했기 때문에 극단적인 환까들에게는 까이기도 한다.] 한편 동제사에서 활동하면서 [[해외]] 민족주의자들의 생활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을 보고 해외 활동보다 국내 활동에 전념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국내로 돌아와 [[중앙고등학교|중앙고보]] 학감[* 현재로 치면 교감의 직위이다.]으로 재직하다 [[조선총독부]]로부터 불온언동 선동 혐의로 찍혀서 조선총독부 압력으로 학감직을 사퇴하고 조선기독교청년회([[YMCA]])에서 학생들을 지도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민족 운동에 뛰어든 것은 1919년 [[3.1 운동]] 이후이다. 안재홍은 정작 3.1 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안재홍 스스로 회고하기를 자신이 운동에 참여하기에 너무 비루한 처지였다고 한다. 하지만 민족 운동을 해야겠다 다짐하여 사건을 벌이는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직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락하는 "대한민국 청년외교단"이라는 비밀결사 총무를 맡았다. 조직이 [[경상도]]에서 발각되자 검거되고 [[대구광역시|대구]]로 압송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고[* 이 때 [[척추]]를 다쳐서 평생 [[허리]] 문제로 고생했다고 한다.] 징역 3년을 구형받아 대구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1920년대 일본 제품이 국내에 유입되자 [[조만식]], [[김성수(1891)|김성수]], [[송진우(독립운동가)|송진우]] 등과 함께 [[물산장려운동]]을 추진하기도 하였고 '민립 [[대학]] 설립 기성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후 안재홍은 언론, 경제, 문화 부분에서 각종 활동을 전개하는데 [[최남선]] 등과 함께 <시대일보>를 창간에 참여해 논설위원을 지냈다가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겨 주필이 되었다. <조선일보>에서 주필 활동을 하는 중에 게재 논설 내용이 문제가 되어 수시로 [[구속]]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1928년 1월 <조선일보> 사설 "보석 지연의 희생"[* 한 [[사회주의]] 운동가가 보석이 지연되어 옥사하자 이를 비판한 사설]이 문제가 되어 감옥에 간 것이고 1928년 5월 <조선일보> 사설 "제남 사건의 벽상관"[* 중국 제남(지난) 지역에서 [[중국군]]과 [[일본군]]이 충돌한 사건에 대해 일본군이 [[파병]]을 결정하자 이를 비판한 사설]이 문제가 되어 감옥에 간 것. 특히 2번째 사건 때문에 <조선일보>가 무기정간 처분을 받게 되는데[* 일제강점기에는 광고료보다 구독료가 신문사 자금에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정간되면 신문사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이후로 조선일보의 경영난은 더욱 심화된다.] 뒤에 무기정간에서 풀리면서 안재홍은 <조선일보>로 복귀하고 이후 <조선일보> 부사장과 사장을 거치게 되었다. 사장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는 객원 논설가가 되는 등 <조선일보>에서 많은 활동을 하게 되는데 1920~1930년대에는 "각종 모임의 간부로 바쁘게 활동하는 <조선일보> 사장"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당시 <[[동아일보]]> 사장은 송진우, <[[조선중앙일보]]> 사장은 노정일이었다. <조선중앙일보>는 재정난과 경영진 문제로 휴간되었다가 사장이 [[여운형]]으로 교체.] 1931년경 경영권 문제에 따른 신구파 갈등이 일어나 <조선일보>는 매우 어지러웠고 안재홍은 <조선일보> 사장에다가 [[신간회]] 간부까지 맡았는데 이 무렵 신간회는 해소론이 나오고 있는 판국이었다. 1920년대에 민족주의자들은 '자치운동론', '민족개조론'을 주장하는 '타협적 민족주의자'(이광수, 최남선)와 절대 [[독립]]을 주장하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안재홍은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로 민족유일당운동의 일환으로 사회주의자들과 힘을 합쳐 좌우 합작 [[독립운동]] 단체인 신간회(新幹會)를 결성하였다. 1931년경 신간회가 일제의 압력으로 해소론이 나오자 안재홍은 신간회 해소를 크게 반대했다. || [[파일:attachment/안재홍/안재홍1.jpg|width=300]] || || [[파일:attachment/안재홍/안재홍2.jpg|width=300]] || || [[파일:attachment/안재홍/안재홍3.jpg|width=300]] || || [[파일:attachment/안재홍/안재홍4.jpg|width=300]] || || [[파일:attachment/안재홍/안재홍5.jpg|width=300]] || || [[파일:attachment/안재홍/안재홍6.jpg|width=300]] ||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의 안재홍[* 사진출처: [[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ia_2974_2295|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1932년 재만주동포구호의연금 유용 사건[* [[만주사변]]으로 인해 [[만주]] 지역 조선인 [[동포]]들이 일본군에 의해 집중 포격을 당하자 마을을 버리고 피난을 가는 등 생활이 크게 어려워지자 <조선일보>에서 동포를 돕자고 의연금을 모았는데 조선총독부에서 의연금 유용을 포착했다고 <조선일보> 간부들을 대거 구속했다.]이 [[일본 제국|일제]]가 <조선일보>를 때려잡으려는 명분으로 딱 걸려서 <조선일보>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고 안재홍은 또다시 구속되었다.[* 이 사건 뒤에 <조선일보>는 여러가지 풍파를 겪었다. 안재홍은 구속당했을 때 사장 [[후임]]으로 1932년경에 석방된 여운형을 <조선일보> 사장으로 영입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홍증식, [[조동호]] 등이 여운형을 <중앙일보> 사장으로 추대시켜 <조선일보>는 사장직이 한때 공석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933년 사장이 조만식에서 [[방응모]]로 바뀌고 그 뒤에는 [[친일]] 언론으로 변질되었다.] 1936년부터 군관학교 사건[* 중국 난징군관학교에 두 청년의 밀파 입학을 알선한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내통한 것이 발각되어 2년형을 선고받아 1938년 풀려났는데 그 해에 부인 이정순이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흥업구락부]] 사건[* 장남 안정용의 결혼식 때 서대문경찰서에 수감 중이라 참석할 수 없었다.], [[조선어학회 사건]][* [[함경남도]] 흥원경찰서에 수감되어 3개월만에 불기소로 풀려났다.] 등으로 계속 수감되고 출옥하는 상황이 반복되며 1940년대에는 [[태평양 전쟁]]으로 시국이 어지러워지자 대외 활동을 줄이고 주로 두릉리 [[고향]] 집에 은거하면서 학술 [[연구]]에 집중했다. 이 때 신민족주의 사학을 주장하는 역사관을 확립하고 민족 주체적 사관을 내세우면서 [[식민사관]]에 맞섰으며 주로 <조선상고사감>을 저술하면서 [[고조선]] 연구에 몰두하였다. 1944년경 여운형으로부터 지하 [[조직]]에 참가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안재홍은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지하 조직은 그만둔다.'고 정중히 사양했다. 안재홍은 국내에 남으면서 마지막까지 조선총독부 당국에 협력하지 않은 몇 안되는 인물이었다.[* 1920년대생 이상 원로들은 '일제강점기 때 [[합법]]적 활동과 비합법적 활동하면서 절대 [[변절]]하지 않은 인물은 안재홍과 여운형이다.'라고 한결같이 말씀하신다.] 1945년 [[8.15 광복]] 직후 여운형이 결성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과거에도 여운형으로부터 [[조선건국동맹]] 참여를 제안받은 바 있으나 그때는 민족주의 진영이 [[건국]]의 중심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서 [[좌파]]로 분류되던 여운형의 협력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나 민족주의 진영을 결집하려는 노력이 좌절되자 여운형과 가까워지게 됐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게 된다. 1945년 8월 16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 자격으로 경성중앙방송 [[라디오]]에 출연하여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건국 구상에 관한 대국민 연설을 발표한다. 그러나 [[박헌영]]이 이끄는 [[조선공산당#s-3]] 등 좌파 세력이 대거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며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좌경화되자 여전히 민족주의 세력이 건국을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안재홍은 [[김병로]], [[원세훈]] 등을 영입하여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내 세력 균형을 유지하고자 했다.[* 안재홍은 여운형 등 중도 좌파가 민족주의 세력이 이끄는 건국 작업의 보조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의 영입이 불발되고 [[조선인민공화국]] 선포 등 좌경화가 가속되자 1945년 9월 초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탈퇴 후 국민당을 창당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지 선언을 하게 된다.[* 하지만 안재홍은 [[한국민주당]]이 주장하는 '임정봉대론'(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절대 숭배한다는 의미)과는 개념이나 격이 상당히 다르다. 안재홍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동격으로 놓고 서로 같이 협력해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이었다.] 국민당이 [[한국독립당(1940년)|한국독립당]](대한민국 임시정부 계열 [[정당]])에 흡수되자 한국독립당에 입당하였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 내용이 국내에 보도되자 그는 [[김구]], [[이승만]]이 극렬한 반탁을 주장한 것과 의견을 달리하였다.([[신탁통치 오보사건]] 참고) 1946년 2월 [[미군정]] 자문 기관 '남조선국민대표민주의원'에 참가했다. 이 무렵 안재홍은 김구, [[신익희]]랑 함께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fs_006_0010_0240|북한에 테러단을 보내기도]] 해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협상 때 배제되었다고도 한다. [[소련]]군 정보 보고서에 의하면 '김구, 신익희, 안재홍의 경우에는 이들이 북조선 지도자들에 대한 [[테러]]를 조직하였고 이를 입증할만한 문서 자료가 존재한다'고 기술하였다. 1946년 5월 무렵 여운형과 [[김규식]] 등이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자 여기에 참여하였는데 안재홍은 '만일 적정 타당한 합작으로 하루빨리 [[통일]] 정부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우리의 조국에는 중대한 [[위기]]가 찾아올 것'이라고 주장하며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했다.[* 좌우합작운동은 미군정의 후원하에 이루어졌고 미군정의 속내는 좌우 합작을 통해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을 고립시키려 했던게 목적이었다. 그러나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했던 안재홍, 여운형, 김규식 등 중도파들은 미군정의 의도도 모른채 이용만 당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들은 분명히 미군정의 의도를 잘 알고 있었고 자신들의 원칙과 주장도 분명했었다.] 1946년 12월 김규식과 함께 [[미군정]]의 '남조선 과도입법위원회' 의원으로 참여하였고 1947년 중도파로 미군정에서 '남조선 과도 정부'를 세우고 안재홍을 민정장관으로 임명했다. 그러자 한국민주당은 중도파 인사가 미군정에서 자리를 차지하는 것에 몹시 못마땅하여 안재홍을 맹렬히 공격하였고 인사 발령도 거부하였다. 또한 안재홍이 [[친일파]] 처단을 주장하자 안재홍을 '용공분자', '골수 친일파'라고 해괴한 논리로 비방하는 [[삐라]]와 벽보가 곳곳에 나붙었고 괴한들이 안재홍 사무실을 습격하여 반탁과 반과도입법위원회를 주장하는 삐라를 살포하기도 했다.[* 이러한 벽보나 삐라들 살포를 주도한 인물은 다름아닌 한국민주당원 [[김준연]]이었다. 해방 정국 상황을 정확히 기억했던 강원용 목사에 따르면 한국민주당은 안재홍에 대해 '그가 일본인에게 [[뇌물]]을 받았다.', '일제강점기 적산 회사의 재산을 착복했다.' 등 근거없는 [[소문]]을 내서 온갖 정치 테러를 가했다고 한다. 이어 강원용 목사는 한국민주당원 김준연이 특정 [[정치인]]에 대한 악의적인 내용의 벽보를 붙이거나 삐라 유포를 주로 하고 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치안]]을 담당하던 [[경찰]]은 한국민주당 비방 삐라를 유포한 사람을 체포하는 것에 비해 민정장관을 음해하는 벽보와 삐라가 돌아다녀도 그냥 [[수수방관]]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 안재홍을 궁지로 내몰았다. 안재홍은 훗날 실의에 빠져버려 '나는 최초에는 찬탁 [[매국노]]요, 다음에는 애국 운동 저해자요, 또 다음에는 극악무도한 [[탐관오리]]로 허다한 비방을 당하게 되었다'고 개탄하였다. 이후 [[김구]], [[김규식]]과는 달리 1948년 [[남북연석회의]]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중도우파로서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했던 것을 생각하면 의외인데, 당시 시점에서 남북협상이 현실적으로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한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5월 10일 실시된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도 출마하지 않았다. 1948년 대한민국 [[제1대 대통령 선거]]에서 2표를 얻는다.[*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2표가 나온 이유는, 초대 대통령 선거는 후보자의 출마 없이 [[콘클라베]] 방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후 대한민국 국기를 시정하는 민간위원으로 참여하고 [[우파]] 신문인 한성일보 사장을 지냈으며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기도 [[평택시|평택군]]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안재홍 외에 [[최석화]] 등 9명의 후보가 후보 등록했으나 그 중 8명의 후보가 사퇴하면서 그 결과 안재홍은 97%에 육박하는 압도적인 지지율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6.25 전쟁]]이 발발하고 [[한강철교]]와 인도교 등이 폭파되자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있다 [[돈암동]] 자택에서 [[조선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었다. 가족의 [[안전]]을 위해서였지만 이 때문에 남한에서 한동안 이름이 거론되지 못하고 남한에 남은 가족들의 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최고위원으로 있다가 1965년 [[사망]]했다. 묘소는 [[평양시]] [[재북인사릉]]에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