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우 (문단 편집) === [[홍건적]]의 침입 === 1359년 겨울, 홍건적 4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 의주, 정주, 인주를 함락시켰다. 이에 안우가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자 홍건적은 무너져 달아났다. 안우가 추격하여 30여 명의 적을 주살하자 홍건적은 철주로 들어갔다. 안우가 기병 70여 기를 거느리고 전장으로 가던 중 산에 올라 말을 쉬게 했는데 갑자기 홍건적의 우두머리 모귀양(毛貴揚)의 군사가 쏟아져 나왔다. 장졸들이 모두 놀라서 얼굴빛이 변했지만 안우는 태연자약하게 웃고 이야기하면서 대소변과 세수, 양치질을 마쳤다. 그 후 안우는 조용히 말에 올라 군사를 이끌고 바로 전진하여 [[청천강]]을 끼고 진을 쳤다. 홍건적 기병 몇 명이 다리에 올라 창을 휘두르면서 용맹을 자랑하자 병마판관 정찬이 칼을 휘두르고 크게 소리치면서 먼저 다리에 올라 적장 1명을 베었더니 적이 조금 물러섰다. 안우는 그 틈을 타 이방실, 장군 이음, 이인우 등과 함께 분전하여 적을 크게 깨뜨렸고 홍건적은 인주, 정주 등으로 물러나 주둔했다. 공민왕은 이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 안우에게 금대(金帶)를 하사했다. 선주 관내 현의 [[백성]]들이 적이 가까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흩어지자 홍건적이 1,000명을 보내 그 마을의 곡식들을 [[약탈]]했다. 이에 안우와 [[김득배]]가 보병과 기병 1,000명을 거느리고 그들을 추격하다가 적의 주둔지에 이르렀는데 홍건적이 정예병을 총동원해 반격했다. 결국 안우 등이 패하여 천호 오중흥과 장군 이인우는 전사했고 군사와 말을 많이 잃었다. 안우는 퇴각하여 정주에 주둔했고 홍건적은 서경을 함락했다. 1360년 고려군이 대대적인 반격에 착수해 홍건적 수천 명을 주살하자 홍건적은 물러나 용강과 함종에 주둔했다. 안우는 안주군민만호도만호에 제수된 후 함종으로 진군했지만 홍건적이 고려군이 진을 치지 못한 틈을 타 돌격하여 패퇴시켰다. 홍건적이 정예 기병으로 추격하자 안우는 이방실, 김어진, 대장군 이순 등과 함께 군사 천 명을 이끌고 적과 죽기로 싸워 수십 명의 머리를 베어 적이 50리 쯤 쫓다 돌아가게 했으나 그 과정에서 1,000명이 산으로 달아났다. 그 후 안우는 철수하는 홍건적을 맹추격해 연주강에서 적을 쳐 홍건적 수천 명이 강에 빠져 죽게 만들었다. 이에 적이 언덕에 올라 저항할 태세를 갖추자 안우 등은 궁지에 몰린 적이 죽기로 싸울 것을 우려해 군사를 거두고 쫓지 않았다. 그날 밤 적이 달아나자 이방실이 이른 아침에 병사들에게 [[밥]]을 먹이고 그들을 추격해 선주에서 적병 수백 명을 죽였다. 결국 홍건적은 불과 300명 만이 살아남아 [[의주군|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달아났다. 안우는 김득배, 경천흥과 함께 이순과 김인언을 보내어 승전을 보고했고 공민왕이 그들의 노고를 위로하자 장계를 올려 하례했다. >홍건적이 침입하여 매처럼 사납고 이리같이 탐욕스러우니 비록 흰 호랑이[白額]가 앞을 막더라도 여우처럼 약삭빠르고 토끼같이 교활하여 욕심을 부리면 반드시 얻었습니다. 홍건적은 험준한 요새라고 하더라도 맞닥뜨리면 도륙하지 않음이 없었고 사나운 불꽃처럼 모두 불살랐습니다. 그것을 바라보기만 해도 간담이 무너지고 악취가 풍겨오는 듯해서 움직일 때마다 마음이 슬펐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태평을 누린 민(民)으로서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덤비는 적을 당해내기는 참으로 역시 어려웠습니다. > >청천강(淸川江)과 안주(安州) 싸움에서 불리했던 것은 비록 신들이 부족한 탓이었습니다만, 서경(西京)과 함종(咸從) 전투에서 공을 세운 것은 사직(社稷)에 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들판에 쌓인 시체가 수만이었고 관문과 나루터로 돌격한 기병이 1,000명을 넘었습니다. 그 흉악한 괴수를 놓쳐 한이 남습니다만 나무에 목을 매어 자결한 자가 많았으니, 그들이 궁지에 몰렸음은 물을 것도 없습니다. 또한 남편과 부인이 서로 목을 찔러 죽은 자가 반이나 되었으니 꾀한 바가 이미 다한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다시 우리나라에 〈침입할〉 뜻이 없다고 여겨집니다. > >비록 그렇다고 하지만 적들 중에는 활과 말에 능숙한 자가 매우 많은데, 그들은 우리나라 사람으로 근년 사이에 죄를 지은 자들입니다. 만일 선성(宣城)에 있는 무리들의 싹을 미리 잘라버리지 않으면 분명히 다시 장래의 우환이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 신 등이 오랫동안 전쟁터에서 고생하고 죽음의 치욕에 내버려진 것을 염려하시어 개선하겠다는 보고를 윤허하시고 명령을 내려 소환하시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가슴을 적셨고 용안을 뵈올 기쁨을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변방의 일은 모두 여름철 방비에 돌렸습니다만, 이 지역의 형편을 돌아보건대 몇 해를 지나야 숨을 돌릴 것이니 지게미와 쌀겨를 얻어 입에 풀칠하는 것 또한 오히려 다행한 일입니다. 술과 고기를 민에게 요구하는 것은 차마 하지 못할 일이니 중국으로 가는 사신이 왕래하면 아침저녁의 죽과 밥을 제외하고 술자리의 비용은 일체 금지하십시오. > >변방의 역관(驛館)은 도로의 가장자리에 있어서 역리[騶吏]가 주현(州縣)에서 출발하면 고을과 역의 거리가 가는 데만 꼬박 하루가 걸리고 물자 공급과 인원 교대도 거의 한 달이 걸립니다. 안주 이남을 제외한 가주(嘉州)·정주(定州)·수주(隨州)·곽주(郭州)·선주(宣州)·철주(鐵州)·용주(龍州)·인주(麟州)의 사람들은 마땅히 본주(本州)에서 나오지 않은 채 빈객을 대접하게 하고 당분간 그곳의 역관을 폐지하십시오. 인민들 가운데 부득이 오랑캐에게 노예처럼 욕을 당하거나 군관(軍官)들 가운데 어쩔 수 없이 산으로 도망하여 숨은 것은 형세가 구차해서 그러한 것이 아니라 힘이 넉넉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고의로 도모한 자들을 제외하고 마땅히 먼저 그 허물을 헤아리고 이를 용서하신다면, 은혜와 위엄을 함께 행사하시어 어긋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 >평민(平民)·노비(奴婢)·양가자손(良家子孫)·장사(將士)들 중에 스스로 공로를 세우려다가 혹 포로가 된 자가 있습니다. 주장(主將)이 비록 명령을 내렸더라도 어찌 매우 급하게 추궁할 수 있겠습니까? 중국인 아이와 남녀를 제외한 사람들은 또한 마땅히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세심하게 살피게 하여 본래의 신분으로 돌아가게 하십시오. 신 등은 예전부터 전투를 치르면서 간간이 건의해야 할 일들이 있었지만, 이번 달 초하루에 군영을 떠나 조정으로 가게 되어 삼가 장계를 받들어 아룁니다. 공민왕이 답했다. >궁지에 몰린 도적이 와서 벌과 전갈처럼 독을 함부로 뿜었으나 의로운 병사가 가는 곳마다 평정하였으니 위엄이 어찌 우레와 천둥뿐이겠는가? 개선을 아뢰고 돌아오면서 장계를 올려 하례하니 가상하구나. 그 후 군사들이 개선하자 공민왕은 장사들을 위해 큰 잔치를 베풀고 안우를 추충절의정난공신 중서평장정사에 임명했다. 그러나 1361년 10월 홍건적 10만 명이 압록강을 넘어 고려를 침공해 삭주와 이성을 함락하자 공민왕은 안우를 상원수로 삼아 적을 토벌하게 했다. 안우는 조천주, [[정지(고려)|정지]], 장신보, [[완풍대군|이원계]], 홍선, 정선 등을 보내 보병과 기병 400명을 거느리고 박주로 진격시켜 적병 100여 명을 참수시켰다. 이후 안우는 여러 부대를 거느리고 안주로 나아가 주둔하며 승전을 보고했다. >정찬, 왕안덕, 김인언, 허자린, 박수년, 김기, 정원보, 유지철, 변안렬, 권장수, 조린, 조인벽 등이 모두 힘써 싸워 공로가 있으니 상을 주어서 사기를 진작시키기 바랍니다. 공민왕이 안우를 도원수로 삼으며 말했다. >변방의 일은 장군이 다스릴 것이니, 그대는 명령을 듣는 자에게 상을 주고 명령을 듣지 않는 자는 벌을 주도록 하라. 그러나 홍건적이 안주를 습격해 고려군을 격파했고 상장군 이음과 조천주가 전사했다. 이후 적이 김경제를 사로잡아 그들의 원수로 삼고 글을 보냈다. >110만 대군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갈 것이니 속히 맞이하고 항복하라. 공민왕이 밀직제학 정사도와 김규를 보내 절령책을 지키게 했지만 홍건적이 밤에 군사 10,000여 명을 책 근방에 매복시켰다가 닭이 울자 철기 5,000명으로 책문을 공격하여 부쉈다. 이에 고려군은 크게 무너지고 안우와 김득배 등은 단기로 도망쳐 돌아왔다. 안우는 군대를 수습하여 총병관 [[김용(고려)|김용]] 등과 함께 금교역에 주둔했다. 이후 공민왕은 사태가 위급함을 알고 마침내 피난하기로 결정하고 개경의 부녀자와 노약자들을 먼저 성을 나가게 하니 민심이 흉흉해졌다. 얼마 후 적의 선봉이 홍의역에 이르자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가 장차 남행하려 했다. 안우는 김용, 이방실 등과 함께 개경을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면서 의병을 모집했으나 응하는 자가 얼마 되지 않자 어쩔 수 없이 공민왕에게 자신들은 여기에 남아 적을 막을테니 피할 것을 권유했다. 결국 홍건적은 개경을 함락시키고 소와 말을 죽여 가죽을 펴서 성에다 두르고 물을 부어 얼게 만들어 사람들이 타고 오를 수 없게 했으며 남녀를 붙잡아 불태워 죽이고 임신한 여자의 젖을 구워 먹는 등 온갖 잔학한 짓을 자행했다. 이에 공민왕은 정세운을 총병관으로 삼아 모든 군사를 지휘하게 했는데 안우는 정세운의 부관으로서 이방실, 김득배, 황상, 한방신, 이여경, 안우경, 이구수, 최영, [[태조(조선)|이성계]] 등과 함께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개경 동교의 천수사 앞에 주둔했다. 그 후 안우는 1362년 1월 17일에 제장들과 함께 총공격을 감행해 적병 10만 명을 몰살시켰으며 홍건적은 잔당 파두 반 등 1만 명만 살아남아 압록강을 건너 멀리 달아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