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양사 (문단 편집) === 창건과 번창 === 서기 900년경 [[고려]]를 건국한 [[왕건]]이 [[금천구|금주]][* 지금의 서울특별시 영등포구·금천구, 경기도 광명시·안양시 만안구 박달동, 석수동][* 참고로 지금의 시흥시 일대는 당시 소성현(현 인천광역시)과 장구군(현 안산시) 소속.]와 [[과천|과주]][* 지금의 서울특별시 서초구, 경기도 과천시·안양시 만안구 안양동, 동안구 전역·군포시]를 징벌하려고 삼성산으로 가던 중 산꼭대기 구름이 오색으로 찬란한 모습을 보고 사람을 시켜 알아보라고 했다. 이때 구름 밑에서 자신을 능정(能正)이라 칭하는 노승이 내려와 지금의 자리에 사찰을 세우고 안양(安養)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우리 태조가 건국한 초기에 ..... 탑묘를 많이 설치했는데 지금 금주 안양사탑 같은 것도 그 중에 하나이다.” >“오색 구름이 피어오르고 ..... 구름 아래에 늙은 승려를 발견했는데 이름을 능정이라 하였다. 같이 이야기 해보니 그 뜻이 맞았으며 이 절을 세우게 된 까닭이다.“ >---- >『도은집(陶隱集)』[* 고려 후기의 유학자 [[이숭인|도은 이숭인]]이 쓴 산문집. 조선 [[이방원|태종]]의 왕명 아래 [[권근]]이 책으로 엮어냈다.] 절을 다 지은 후에는 공동 책임자였던 능정에게 도승통의 칭호를 내렸고, 대각국사 의천이 이곳으로 와 능정의 진영을 참배하고 조사당에서 경전을 읽고 가기도 했다. 또한 [[김부식]]이 탑명을 짓고 가기도 했으며, [[무신정권]]때는 주변의 절들의 승려와 같이 거병, [[최충헌]]을 척살하고자 했지만 실패했다. [[우왕]] 7년(1381)에는 [[최영]]이 직접 안양사 7층 전탑을 중수했고, 우왕 9년(1383)에는 이 전탑의 사방과 절의 회랑에 그림을 그려넣었다. 고려 말기만 해도 집권층이 직접 나설 정도면 상당히 중요한 절이었던 모양이다. >최영 장군의 안양사 7층 전탑 중수와 낙성식 >"왕이 내시 박원계를 보내어 향을 내리고 사리 열두개와 부처 치아 한개를 탑 가운데 모셨다. 이때 승려 천 명이 불사를 올리고 보시한 시종이 삼천이었다." >---- >『도은집』 권4 (우왕 7년, 1381) >"우왕 8년 안양사 7층 전탑의 단청에 이어 이듬해 탑 안 사방 벽에 약사회와 석가열반회, 미타극락회와 금강신중경을 그렸다. 또한 회랑 열두칸에는 십이행년불을 그려넣었다." >---- >『도은집』 권4 (우왕 9년, 1383)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