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병찬(1881) (문단 편집) == 해외에서의 독립운동 == 1911년, 안병찬은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장형을 선고받고 지도군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석방된 그는 만주로 망명했고,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그해 3월에 조재건(趙在健), 함석은(咸錫殷), [[오학수]], 지중진(池仲振) 등 동지들과 함께 안동현에서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을 조직하고 총재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1919년 9월에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송환되어 1년 6개월 징역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병에 걸려서 병보석으로 가출옥되었다. 그는 병이 어느정도 낫자 다시 망명했고, 1920년 남만주의 관전현에서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의 총재로 추대되었다. 또한 남만주 각지의 독립운동단체들을 통합할 필요를 느끼고 김찬성(金燦聖)과 같이 대한청년단연합회를 대표해서, 평안북도독판부(平安北道督辦府) 대표 [[조병준]](趙秉準). 김승만(金承萬), 독립단(獨立團) 대표 [[김승학]](金承學) 등과 관전현 향로구(香爐溝)에서 통합회의를 열었다. 그 결과 1920년 12월 12일 기원독립단, 한족회 등의 통합안을 도출해내고 1921년 2월 향로구에 남만주 독립운동 통일기관인 대한광복군(大韓光復軍)을 설치했다. 1920년 4월, 안병찬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평안북도독판부의 독판에 임명되었고, 5월에 [[김승학]], [[이탁(1889)|이탁]] 등과 함게 상하이로 가려 했다가 중일 합동경찰에게 체포되었다. 하지만 관전현 지사의 호의로 석방될 수 있었고, 이후 상하이로 가서 임시정부와 만주의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협의했다. 그 결과 남만주의 교민통치기관은 대한광복군참리부(大韓光復軍參理部)라 칭하여 임시정부 내무부의 직속기관으로 하고, 남북 만주의 군사기관은 대한광복군사령부(大韓光復軍司令部)라 칭하여 임시정부 군무부의 직할로 하기로 결정했다. 1920년 9월에는 임시정부의 법무차장(法務次長)에 임명되고, 임시정부 법률기초위원회(法律起草委員會) 위원장에 임명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