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법고등학교 (문단 편집) == 역사 == [[파일:공베르신부.jpg]] ||안법고등학교의 설립자인 [[앙투안 공베르]] 신부. 한국명은 공안국(孔安國)으로, 안법학교 설립 외에도 많은 업적들을 남겼다.|| 안법고등학교의 역사는 [[파리외방전교회]]에서 파견되어 온 [[프랑스인]] [[선교사]]인 앙투안 공베르 신부가 1900년 10월 [[경기도]] [[안성시|안성]]에 자리잡으면서 시작된다. [[대한제국]]의 국권이 기울어가던 시대상황 속에서 지역의 유지들은 공베르 신부에게 학교 설립을 건의하였고, 공베르 신부는 1908년 가을에 그 제안을 수락하여 1909년 1월 15일, 사립공교 안법학교(私立公敎 安法學校)가 설립된다.[* '공교(公敎)'는 [[가톨릭]]을 우리말로 한 것이고, ‘안법(安法)’은 [[안성]]의 '안' 자와 [[프랑스]](법국)의 '법'자에서 유래된 것이다.] 당시 전교생은 남학생 25명이었다. [[파일:1912년 안법고 졸업사진.jpg]] 1912년 안법학교 교직원과 학생들. 개교 당시 학교는 10평 내외의 허름한 교실이었지만, 점차 학생 수가 증가하면서 학년제와 학급제를 도입하였다. 당시 안법학교의 학생들은 [[3.1 운동]]에 참여하는 등 사회적으로 활발한 모습을 보였다. 1936년 이복영 신부가 부임하면서 학교를 확장하여 어엿한 [[보통학교]]([[초등학교]])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이후 여러 차례 학제를 개편하면서 1938년에는 '안법심상소학교', 1942년에는 '안법국민학교'로 교명이 바뀌었다. 1945년 [[의무교육|초등교육이 의무화]]되자, 당시 주임신부였던 김재근 신부는 학교를 중학교로 개편하였다. 1947년 9월 5일, '안법초급중학교'라는 이름으로 개교식 격 입학식을 실시하였다. 1951년부터는 '안법중고등학교'로 운영되었으며 [[6.25 전쟁]] 와중에도 계속하여 학교 건물을 신축하였다. 이때의 학생들은 1960년 [[4.19 혁명]] 속에서 수업을 거부하고 도보로 [[서울]]로 올라간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파일:2014041961244.19-안법고9회.jpg]] 안성의 [[4.19 혁명]]을 이끈 안법고등학교 9회 졸업생 사진. 1970년대, 안법중고등학교는 위기를 맞게 된다. 중학교 과정의 의무교육과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고교 교육과정의 내실화를 이유로 안법중학교는 1985년 36회 졸업생을 끝으로 폐교되었다. 이후 안법고등학교는 1987년부터 여학생을 받아 현재까지 [[남녀공학]]으로 운영되고 있다. [[파일:1970년대 안법고 전경.jpg]] 1970년대 안법고등학교의 전경. 2019년, 개교 110주년을 맞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