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방준 (문단 편집) === 후대 석학들의 평가 === ◯ 이의현(李宜顯, 1669년 ∼ 1745년) “전라도 보성(寶城)의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은 유현(儒賢)과 절개를 지킨 선비이다.”[* 이의현(李宜顯, 1669년 ∼ 1745년)의 『도곡집(陶谷集)』(1766) 권28 雜著 / a181_438a : 祖宗朝。兩南人物。最多登顯。... 寶城則安牛山邦俊。... 無非儒賢節士文人名臣良將也。] ◯ 홍직필(洪直弼, 1776년 ~ 1852년) “호남의 학문에서 하서(河西: [[김인후]]), 고봉(高峯, [[기대승]]), 일재(一齋 : 이항), 은봉(隱峯 : 안방준), 손재(遜齋, 박광일)가 가장 두드러진다.” ◯ 김희순(金羲淳, 1757년 ~ 1821년) “학문·절의·지조를 빛내 사림의 본보기가 되고 후생의 거울이 되니, 천고에 사문(斯文)을 붙잡아 정도(正道)를 지킨 사람이다.” ◯ 이민보(李敏輔, 1720년 ~ 1799년) “호남의 높은 희망이요 북두성 같은 고매한 명성으로 수많은 선행(善行)을 남겼다.” ◯ 이도중(李度中, 1784년 ∼ 1872년) “도학과 절의가 옛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을 뿐 아니라, 덕행의 성실함과 사공(事功, 공훈과 업적)의 탁월함을 겸비했다.” ◯ 김종후(金鍾厚, 1721년 ∼ 1780년) “선생의 덕업(德業)과 풍의(風儀)는 후학들이 칭송하고 흠모하는 바이다.” ◯ 송환기(宋煥箕, 1728년 ~ 1807년) “선생의 깊은 학문, 높은 절개, 위대한 문장, 넓은 의견은 세상에 밝혀져 있다.” ◯ [[황현]](黃玹, 1855년 ~ 1910년) “고심하며 충현처럼 죽고자 하였고 직필은 야사 통해 전하려 하였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