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두희 (문단 편집) == 기타 == * 안두희가 [[백의사]]의 일원이라는 설도 있었으나, [[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1&nNewsNumb=20161021591&nidx=21592|이성렬(李聖烈)이라는 사람의 말에 의하면 백의사 요원이 아니라고 한다.]] 후에 미군과 구소련의 자료들에서 밝혀지길, 김구가 [[백의사]]의 실질적인 단장이라고 결론났으니 언급할 가치도 없는 설이다.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65520|평소 침술을 공부했던 권중희는 생명에 지장이 없게 둔부에 대침을 몇번 놔줬다.]] 이건 언론에 잘 실려있지 않은데, [[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28086|권중희가 말하지 말라고 했다.]] >제가 안씨를 몇 차례 때린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기자들에게 그 사실은 쓰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그 까닭은 내가 안씨를 때렸다는 사실이 알려질까 봐 두려워서가 아니라 값싼 동정심에 진실이 훼손될까 우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 1981년 [[미국]]으로 이민가기 위해 가족들과 재산들을 보냈다. 그리고 자기도 가려고 했으나, 이는 비난여론과 총대를 맨 권중희로 인해 여권을 발급받지 못해 좌절되었다. 그래서 1996년에 박기서에 의해 처참한 최후를 맞이할 때에도 인천 신흥동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아내랑 살고 있었다고 한다. 한편 박기서는 여전히 뜨거운 국민여론을 감안, 3년을 선고받았으나 1년 3개월만을 살고 출소했다. * [[http://ja.wikipedia.org/wiki/%E6%96%B0%E6%BD%9F%E6%97%A5%E8%B5%A4%E3%82%BB%E3%83%B3%E3%82%BF%E3%83%BC%E7%88%86%E7%A0%B4%E6%9C%AA%E9%81%82%E4%BA%8B%E4%BB%B6|59년 북송선 폭파미수 사건때 현장 에이전트]]로 있었다고 한다([[니가타 일본 적십자 센터 폭파 미수 사건]]). 53년에 제대해서 군납 두부, 콩나물 장사를 하던 사람이 어떻게 폭파 사건에 관여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안두희는 포병장교 출신이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백의사]] 암살특공대라는 CIC 문서도 있으니, 그냥 넘길 수는 없다. * [[사찰요람]](1955)과 시역의 고민(1955)에서는 김학규의 부하였는데, 김구가 경무대에 포격을 해서 대통령을 암살하려고 했는데 거기에 대해 말다툼하고 화가 나서 총을 쐈다고 주장하고 있다. CIC 첩보를 했기 때문에, 김구의 조직이 아니라고도 하나 원래 김구와 미군정은 협력관계였다. 그래서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fs_006_0010_0040|북한에서 테러리스트들이 내려올 때]] 미군정청에 신변보호를 강화해달라고 했다. [[장덕수]] 암살 뒤에는 단절되었다.[[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fs_014_0050_0020_0130|#]] * 김구를 최초로 저격한 인물이 안두희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조선혁명당 당원이었던 [[이운한]]이라는 인물도 있었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강화와 민족의 결집성을 위해 3당 합당을 논의하게 되었을 때 이에 불만을 표출하다 백범 김구를 비롯해 3당 요인들을 권총으로 난사했다. 이때 [[조선혁명당]]의 현익철은 현장에서 사망하고, [[유동열]]은 중상, [[이청천]]은 경상을 입었고 한국국민당 김구는 심장 부근에 총상을 입고 중태로 후송되었다.[* 이때 김구는 극적으로 살아남았지만 후유증으로 수전증이 심해져 글씨를 쓸 때마다 이상하게 쓰여져 "떨림체" 라는 글씨체를 얻게 되었는데, 김구는 이것을 '''총알체'''라고 불렀다.] 이운한은 장사 교외에서 체포되었으나 바로 감옥에서 탈출하였다. 당시 중국에서 밀정을 이용해 독립운동가에 대한 유괴 암살이 성행했는데 임시정부는 수사권이 없었고 중국현지정부는 무능부패해서 제대로 수사가 진행된 것이 별로 없다. 뉴라이트 추종자들이 이를 이용해 독립운동의 노선갈등이 동기로 오로지 김구만 피습당한 것으로 왜곡해서 설명하는 경우가 있다. 이운한이 독립운동의 노선갈등으로 이런 짓을 저질렀다면 그후에도 활동한 행적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 없다. 아예 행적이 묘연하다. 밀정으로 독립운동가들을 염탐하고 분열을 조장하다 끝내는 한방 터뜨리고 나른 것이다. 이운한은 그 당시 김구가 기적적으로 회생을 하게되고 미수에 그치게 되어서 안두희에 비해서 묻혀지게 된 인물이 되었다. * 김구의 입장에서 보면 일제의 지배를 받던 1938년에 이운한의 총격을 받았으니 하마터면 '''조국 해방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뻔 했던 아슬아슬한 순간'''을 넘겼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나마 저때 김구가 회생을 했으니 그렇지 저 때 먼저 사망했다면 꿈에도 그리던 조국해방도 보지 못했거나 환국조차도 하지 못하고 이국 땅에서 죽었을지도 몰랐던 상황이다. * 사실상 이 사람이 죽으면서 김구 암살의 배후나 정확한 암살 사유를 알길이 영원히 없어졌다. 배후로 제일 많이 추측되는 [[이승만]] 전 대통령과 안두희의 관련인들도 모두 이미 죽었는데 직접 그를 암살한 당사자까지 죽었기 때문에 물어볼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백범 김구 암살사건의 배후는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게 되었다. 이 때문에 안두희 피살을 국민의 감정에 치우친 [[사적제재]]의 사례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죄질과는 별개로 안두희는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증인 중 한 명이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건의 진실이 밝혀질 가능성도 있었기에 안두희 피살을 마냥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물론 이는 전적으로 안두희가 진실에 대해 입을 연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지만 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