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두희 (문단 편집) == 생애 == 1917년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지주|대지주]] 안병서(安秉瑞)의 [[아들]]로 태어났다. 1934년 [[신의주]]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메이지대학]]에 다녔다. 해방 후 1947년에 [[서북청년회]]에 가입 후 극단적 반공주의자로 변했다. 육사 8기 졸업 후 [[남조선국방경비대]] 장교로 임관하여 포병[[사령부]] 소속 포병[[소위]]가 되었다. 포병사령관 장은산과 김지웅, 홍종만의 사주를 받고 1949년 6월 26일 [[서울특별시]] [[경교장]] 서재에서 [[백범 김구 암살 사건|백범 김구를 권총으로 암살하였다.]] 이에 무기징역을 받았으나 3개월도 안 되어 15년으로 감형되고 6.25 전쟁이 발발하자 풀려나서 군인으로 복무한다. 그리고 1953년 살인을 저지른 지 4년도 채 되지않아 완전히 복권된다. 이후 군 납품업을 하면서 큰 돈을 벌기도 했으나, [[4.19 혁명]] 이후 민족정기회복을 부르짖는 청년들에게 쫓겨 잠적생활과 납치 등을 겪었다. 예를 들어 1965년 곽태영[* [[1936년]] [[2월 20일]]~[[2008년]] [[12월 1일]]. 독립운동가 집안으로 어린시절부터 백범일지를 끼고 살았다고 한다. 고3이 되던 19살에 김구 묘소에 가서 암살범을 응징하겠다고 다짐했으며, 그로부터 10년 뒤인 1965년에 실행한 것이다. 이후 2000년 문래공원 박정희 흉상 철거, 2001년 탑골공원 삼일문의 박정희 현판 철거 등을 주도했으며 [[2008년]] 당뇨로 사망했다. 여담으로 권중희와 생년월일이 5일차이 난다.]에게 칼을 맞았고, 1987년 권중희[* [[1936년]] [[2월 25일]]~[[2007년]] [[11월 16일]]. [[2007년]] 자택에서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여담으로 곽태영과 생년월일이 5일 차이나고 1년 후 곽태영도 사망한다.]에게 '정의봉'을 맞아 갈비뼈와 머리가 깨졌으며 같은 해에 노송구에게 각목으로 얻어맞기도 했다. 1992년에는 또다시 권중희가 안두희를 납치해 [[가평]]으로 끌고갔고 여기서 안두희는 이승만의 명령을 받아 김구를 암살했다고 얘기한 적이 있으나 이후 권중희의 납치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이었다고 부인하였다. 그 외에도 본인 단독 범행이라고 얘기했으며, 언론사 인터뷰에서는 [[김창룡(군인)|김창룡]]의 명령을 받았다고 얘기하기도 하고, 미국이 시킨 일이라고 얘기하기도 하는 등 말을 자주 바꿨고, 1994년 국회 법사위 '백범 김구 선생 암살 진상규명 소위원회' 증언에서조차 정확한 배후에 관해서 [[실어증]]을 이유로 침묵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