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함경 (문단 편집) == 왜 존재감이 없었는가 == 한반도에서 아함경은 오래도록 큰 인지도가 없었는데 이것은 한반도뿐만이 아니라 근현대 이전까지 [[대승 불교]] 문화권 대부분의 공통된 사항이었다. 그 이유는 중국에 불교가 전해질 때 인도처럼 불교가 자국에서 생겨나 경전들이 순차로 등장하지 않고 외래 종교로서 불교가 유입된 후 다양한 종류의 경전이 실제 생성 연대하고는 무관하게 인도 유학승이나 인도에서 온 포교승들로부터 동시다발로 들어와 경전의 위치와 순서와 중요도를 따지는데 많은 어려움이 생긴 것과 관련이 있다. 이 과정에서 교상판석[* 敎相判釋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그 말한 때의 차례, 방법, 형식, 의미, 내용 따위에 따라 분류하고 체계화하는 일로서 유의어로는 敎判ㆍ判敎ㆍ判釋이 있다. 원시 형태 교상판석은 인도에서도 있었지만, 상술한 이유로 중국을 비롯한 북방불교 문화권에서 더욱 많이 벌어졌다.]이라 하여 [[불경]]을 여러 범주로 분류하려는 시도가 생겨났는데 문제는 이 교상판석에 따른 분류가 당시 학문의 발달 수준상 실제 역사에 맞게 실증으로 경전을 분류할 능력까지는 되지 않았다는 것과 각 종파에서 자신들의 이론의 정당성의 근거를 찾으려고 각기 나름대로 분류법으로 각자의 교상판석 연구를 내놓은 데서 문제가 생겨났다. 이 과정에서 초기 경전이었기에 사상상/철학상 부분은 후기 대승 불교 경전들보다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던 아함경은 중요도가 낮은, 혹은 석가모니가 전법 초기 방편론상으로 설한[* 특히 천태종 쪽이 주로 이런 입장이다. 천태종의 소의 경전인 [[법화경]] 자체가 다른 경전들은 석가모니가 법화경을 설법하려는 전 단계, 즉 방편론이었다는 것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근기가 낮은 경전으로 분류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는 후대에 나타난 대승 불교 경전들이 여타 경전과의 비교에서 크게 부각되었는데 초기 경전인 아함경은 중요도가 낮은 [[불경]]으로 분류되었고, 이후 대승 불교가 중국에서 한국과 일본으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각국에서도 나름대로 교상판석으로 경전을 분류하였으나 큰 틀은 중국의 교상판석에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대승 불교 경전 중심의 풍조는 바뀌지 않았다. 이런 구조가 바뀌게 된 것은 근대 일본에서였다. 1차 세계대전 무렵까지 일본은 영국과 우방이었다. 당시 일본 학자들은 영국에서 스리랑카의 빠알리어 [[니까야]]를 번역한 "새로운" 불경(PTS본)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역사적인 인물 [[석가모니]] 부처님이 친히 설하신 말씀으로 보이는 기록을 동북아인으로서 처음으로 접한 것이다. 요약하면, 근대 일본은 서구의 실증에 기초하고 비판하는 태도로 종교를 연구하는 학문이 들어오면서[* 물론 그 전부터 청대 고증학의 등장과 그 영향으로 불교 문헌과 교단의 성립을 향한 비판은 어느 정도는 있어 왔다. 당장 한반도에서도 승려 백파 긍선(1767-1852)과 추사 김정희(1786-1856) 간의 논쟁이 이것 탓에 벌어졌으니까.] 기존 교상판석에 근거한 [[불경]] 분류 자체를 비판하고 대승경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하신 것이 아니라는 [[대승비불설]]이 등장하는 등 기존 연구를 상대로 삼은 반성이 일어났고, 여기에 추가로 고려대장경을 비롯한 기존 대장경들을 저본으로 [[대승 불교]] 경전과 아함경을 빠알리어 니까야와 산스크리트어 경전과 대조하여 불교 여러 종파의 경전을 모은 대정신수대장경(다이쇼신수대장경)이 편찬되었다. 그리고 1935~1941년에는 빠알리어 대장경인 《남전대장경》(南伝大蔵経)을 출판하면서 일본 내 불교 연구에서는 황금기를 구가하던 시기였다. 자연히 이 과정에서 아함경은 새롭게 주목받게 되었고 지금도 아함경 성립 관련 연구나 불교 문헌의 객관 편찬 연대 등의 연구는 일본이 나름대로 연구 자료가 있는 상황이다. 결과적으로 아함경은 불경 중에서도 매우 이른 시기에 나왔는데도 [[나무위키]]에 [[반야심경]]보다 늦게 등록되었다. 알고 보면 그럴만도 했던게 한국 불교계 자체가 의식 있는 일부 스님과 불자를 제외하면 아함경을 비롯한 초기 경전에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승려들은 한국 불교의 사상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되는 [[화엄경]]이나 [[금강경]]이 중심이고, 불자들은 사경 시 승려들이 많이 권하는 [[불경]]인 [[금강경]]과 [[법화경]]에만 익숙하다. [[2006년]]만 해도 아함경을 생소해 하는 불자가 많았고 지금도 생소해 하는 불자가 많은 게 현실이다.([[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1649|참조]]) 하지만 다행히도 현재 한국에는 초기 불교를 향한 불자와 승려들의 인식이 점점 변하고 [[장아함경]], [[잡아함경]], [[증일아함경]]의 완역이 끝난 상태이다. 이것을 열람하고 싶은 사람은 [[동국대학교]] 불교 아카이브에서 무료로 온라인 열람하거나 시중에서 아함경을 쉽게 살 수 있다. 온라인으로 보면 무료이지만 출판본에는 주석과 해설 등이 있어[* 물론 온라인판이라고 주석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읽기가 더욱 나으니 직접 사거나 근처 도서관에 신청하자. 요즘 초기 불교의 연구는 동남아시아의 [[테라와다]]에서 전해온 [[니까야]] 경전을 중심으로 많이 진행되고 있으며 아함경과 니까야의 비교 작업도 진행 중이다. 그러나 경과 율, 논(아비담마), 그리고 [[위빳사나]] 수행까지 두루 갖춘 것은 남방불교인 테라와다이므로 테라와다를 중심으로 초기불교 연구와 수행이 진행되고 있다. 2013년에는 [[조계종]]에서 사미승을 교육하는 교재에 니까야 번역본이 들어가게 되었다. 북방불교에서 초기 불교의 흔적은 아함경에 일부 남아 있지만, 북방불교에서는 초기 불교 수행 이론에 해당하는 논서가 부족하고 [[위빠사나]] 수행의 맥이 끊겼으므로 아함경을 중심으로 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활발하지 않다. 이와 관련된 연구는 과련 논문들이나 학술서들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엄밀히 따져 아함경이 존재감이 없었던 이유는 위의 이유보다는 불교가 수용될때 불교 그자체의 가치 보다는 범인류적인 종교가 지역색을 나타내는 종교와 그 지역의 신앙과 결합한 토호세력들을 누르고 왕권강화와 백성들을 통합하기 위한 도구로서 가치가 아함경의 부파불교가 대승불교보다 적합하지 않았던 것이 보다 본질적인 이유다. 다분히 정치적인 목적으로 육성된 종교가 대승불교이며 오늘날 불자들이 잊혀졌던 아함경을 보면서 초기불교를 다시 공부하는것도 그 지역의 정치세력과 지역신앙들의 결합을 통해확장된 대승불교의 불교관이 정말 부처가 말한 그것이 맞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자 하는 욕구가 반영된 것이다.. 다만 이는 대승불교만이 가지는 특성은 아니고 종교가 확장되면서 보여지는 보편적인 모습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