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틸라 (문단 편집) === 사람됨과 인품 === 후대의 기록에 보이는 아틸라의 성품은 의외의 관대함과 소박함, 그리고 잔혹함과 교활함이 공존하는 복합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후대의 많은 정복군주들처럼 매우 현실주의적인 성격이었으나 세상을 전란에 빠뜨린 장본인인지라 긍정적인 기록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이런 기록들에서도 아틸라가 지닌 의외의 면모를 약간은 찾아볼 수 있다. 《비잔틴사(History of Byzantium)》를 편찬한 것으로 유명한 동로마의 역사가인 [[프리스쿠스]]는 449년에 동로마의 사절 중 한 사람으로서 훈족에 파견된 일이 있었다.[* 앞서 언급했던, 동로마 황제가 몰래 자객을 끼워넣어서 보냈던 바로 그 사절단의 일원이었다.] 당시에 프리스쿠스는 다른 사절들과 함께 아틸라의 연회에 초청받았는데, 그곳에서 목격한 아틸라의 모습과 행동거지를 상당히 자세히 묘사한 바 있다. 프리스쿠스의 묘사에 따르면, 아틸라의 용모는 당시 동로마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에 추하고 매력이 없는 편이었다.[* 사실 이 부분은 현존하는 프리스쿠스의 기록에는 없다. 다만 [[요르다네스]]가 아틸라의 외모를 묘사한 대목에서 프리스쿠스의 기록을 참고했으리라 보는 것이 다수의 견해이다.] 그러나 프리스쿠스가 본 그의 몸가짐은 상당히 검소하고 절제적이며 또한 금욕적이었다. 프리스쿠스는 자신이 남긴 기록에서 훈족과 고트족을 모두 스키타이 혹은 야만인이라 칭하며 무시하였으나, 아틸라의 성품과 인격만큼은 의외로 상당히 높게 평가했다. 아틸라는 자신의 부하들과 사절단들에게는 값비싸고 귀한 음식들을 베풀었고, 금은으로 만든 화려한 술잔으로 대접하였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목기로 만든 접시와 술잔을 사용했으며, 연회 중에는 고기 몇점을 먹었을 뿐 사치스러운 음식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그의 옷차림은 정갈하되 검소하고 소박해서, 옆구리에 검을 차지도 않았고, 또한 다른 훈족이나 고트족들과는 달리 부츠에 걸쇠가 걸려있지도 않았다. 또한 다른 이들이 보석과 귀금속으로 만든 말굴레를 사용했던 것과는 달리 아틸라 자신은 수수한 모양새의 말굴레를 사용했다고 한다.[* 역사학자 피터 히더는 이런 아틸라의 검소함에 대하여, 스스로 세속적인 욕망에서 벗어난 초월적인 지도자라는 점을 부하와 로마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연출한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기도 하였다. 이런 점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과도 닮았다.] 마찬가지로 프리스쿠스의 증언에 의하면,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라틴어와 훈족 및 고트족의 언어를 구사하며 재주를 부리던 난쟁이 광대인 제르코[* 이 인물은 아틸라의 형인 블레다의 총애를 받던 훈족의 궁중 광대였다. 아틸라는 제르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지 후에 그를 추방하였다.]의 재미있는 공연을 보고 자지러지게 웃는 와중에도 아틸라만큼은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묵묵히 구경만 하다가 자신이 특히 귀여워하는 막내아들인 에르나크가 걸어오는 것을 보고서야 겨우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프리스쿠스에 따르면, 아틸라는 자신의 다른 아들들에게는 별다른 애정을 표하지 않았으나 에르나크 만큼은 예외적으로 각별히 애정을 표했다. 이는 에르나크가 훗날 위기에 처한 훈족의 명맥을 이어나갈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 예언은 기묘하게 적중해서, 아틸라 사후에 훈족이 사분오열할 당시 아틸라의 다른 아들들인 엘라크와 뎅기지크는 각기 게피다이와 동로마와의 전투에서 전사하였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에르나크는 결국 동로마에 항복하여 다뉴브의 작은 영지를 받고 그 곳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 또한 앞서 이야기하였듯이 아틸라는 훈족의 통치 체계를 혁신하기 위하여 외국 출신의 인물들을 대거 등용하여 측근으로 삼았다. 이들은 자신들의 조국에서조차 받을 수 없던 대우를 아틸라에게 받았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충성을 다했다고 하였는데, 이를 보건대 사람을 다루는 능력도 상당히 출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런 면과는 별개로 전장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잔혹한 인물이었다. 그는 동로마 원정 당시에 보여준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적을 천천히 짓밟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이는 도시 약탈과 파괴 및 무수한 살상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당시에 아틸라가 벌였던 전쟁의 참상은 그를 증오하던 로마인들이 기록한 것이 대부분인지라 과장되거나 왜곡된 내용도 일부 있는 듯하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해보면 그만큼 당대인들의 시각으로도 아틸라의 전쟁 방식은 매우 참혹하고 잔인했던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