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토스 (문단 편집) == 역사 == '아토스'라는 이름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기가스]]의 다른 명칭이다. 전설에 따르면 기가스(아토스)가 [[포세이돈]]에게 커다란 바위를 던졌는데 그 바위가 [[에게 해]]에 박히면서 아토스 산이 되었다고 한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크세르크세스 1세]]가 그리스를 침략할 때 아토스 반도의 북쪽에 [[운하]]를 파서 반도가 섬이 되었던 적이 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에는 아토스 산을 통째로 알렉산드로스의 모습으로 조각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리스도교]]의 한 전승에 따르면 [[성모 마리아]]가 [[사도 요한]]과 동행하여 [[라자로]]를 만나기 위해 [[텔아비브|야파]]에서 [[키프로스]]로 항해하고 있을 때 아토스에 상륙하였고, 그 인연으로 훗날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되었다고 한다. 이 전승 때문에 오늘날까지 모든 여성들은 아토스 출입이 금지되고 있다. --성모 마리아는 여자인데 정작 여자들은 막는 아이러니-- [[로마 제국]] 치하 아토스에는 4세기부터 그리스도교 [[수도자]]들이 있었고, 한동안 그리스도인들과 다신교인들이 공존하였다. 다신교 황제인 [[율리아누스]] 치세에는 아토스의 그리스도교 교회들이 공격받았으며, 역으로 그리스도교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 때에는 다신교 신전들이 파괴되었다. 885년 황제 [[바실리오스 1세]]가 반포한 [[금인칙서]]에서 아토스를 수도자들만의 땅이라고 선언하여 평신도들의 정착을 금지하였다. 아토스가 지금과 같은 모습을 띠게 된 때는 중세 [[동로마 제국]] 시대이다. 958년에는 아타나시우스라는 수도자가 아토스에 오게 되었다. 아타나시우스는 962년 아토스의 수도 카리에스(Καρυές)에 중심 성당인 '프로타톤(Πρωτάτο)'을 건설하였다. 이듬해에 아타나시우스는 자신의 친구였던 황제 [[니키포로스 2세]]의 지원을 받아 '대 라브라 수도원(Μονή Μεγίστης Λαύρας)'을 지었으며 이 수도원은 현재까지 아토스 내 20개 수도원들 중 가장 으뜸가는 수도원이다. 아타나시우스는 아토스의 수도원 공동체를 세운 중요한 인물이며 훗날 '아토스의 아타나시우스(Αθανάσιος ο Αθωνίτης)'라고 불리우게 된다. 11세기 말과 12세기 초에는 세르비아 공국과 [[키예프 공국]]에서 온 수도자들이 아토스에 정착하였다. 세르비아인과 [[루스#s-3]]인 수도자들은 서로 수도원들을 공유하다 세르비아인들은 '힐란다리우 수도원(Манастир Хиландар)'을, 루스인들은 '아기우 판델레이모노스 수도원(Пантелеимонов монастырь)'을 사용하게 되었다. 1342년부터 1372년까지 아토스는 세르비아의 영토였다. [[세르비아 제국]]의 황제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은 아토스에 기부를 쏟았다. 세르비아 수도자들의 힐란다리우 수도원은 스테판 두샨의 지원을 든든하게 받으면서 영역을 확장하여 당시에는 전체 아토스 반도의 3분의 1을 갖게 되었으며, 현재도 이 수도원은 반도의 5분의 1을 갖고 있다. 한편 세르비아 귀족인 안토니예 바가슈(Антоније Багаш)는 자기 돈으로 폐허가 된 '아기우 파블루 수도원(Μονή Αγίου Παύλου)'을 매입한 뒤 재건하여 수도원장으로 취임하기도 하였다. 세르비아 통치 시기에 세르비아 왕족 여자들 중에서 아토스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었던 적이 두 번 있었다. 그리스도교 시대 이래 최초로 아토스에 들어가는 걸 허락받은 여자는 스테판 두샨의 부인인 옐레나(Јелена) 황후였으며, 두번째는 세르비아의 공주인 마라 브란코비치(Mara Branković)였다. [[오스만 술탄국]]이 1430년 [[테살로니키]]를 정복할 때 아토스도 오스만 술탄국에 포함되었는데 아토스의 수도자들은 오스만의 [[술탄]]들과 우호적으로 지냈으며, [[무라트 2세]]와 [[메흐메트 2세]]에게 자치권을 보장받았다. [[셀림 1세]]는 아예 '''이전의 전란으로 인해 파괴되거나 훼손된 수도원들을 국가재정으로 복구하고, 후손들도 절대로 파괴해서는 안된다'''라고 명령을 내렸으며, 이후의 파디샤들도 재정적으로 수도원들을 지원하거나 최소한 보호하는 조치를 내렸다. 17세기 오스만 제국의 여행가인 에울리야 첼레비(Evliya Çelebi)의 1667년 5월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아토스 일대에 대규모 기근이 발생해 "굶주림에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할 정도"였으나 폭도들이 아토스 수도원들만큼은 털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리스 독립전쟁]] 시기에는 1824년부터 1830년까지 수도원에 3,000명으로 구성된 군대가 주둔하기도 했으나 오스만 제국에 의한 정교회 자치권보장은 오스만 제국 시기 내내 지켜졌다. [[발칸 전쟁]] 이후 아토스는 [[그리스 왕국]]의 영토가 되어 현재 [[그리스]]에 이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