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크사이친 (문단 편집) == 역사 == 중국과 인도 사이 [[히말라야 산맥]] 여느지역이 그렇듯 워낙 오지인 탓에 근대 이전에 이곳의 통치권은 불분명하였다. [[영국-시크 전쟁]] 이후 영국 속국 [[잠무 카슈미르]] 번왕국이 세워져 카슈미르가 영국의 세력권에 들어오면서 영국은 이곳에 대한 지리조사 및 국경 그리기 시도를 시작한다. 영국이 이 지역에 그린 첫번째 선은 영국령 인도의 공무원 윌리엄 존슨이 그린 '존슨 선'. 다만 이 선은 타국의 점유관계를 막론하고 지리적인 조사 이후 자연환경에 따라 선을 그은 만큼 아크사이친은 물론 오늘날 중국의 영토로 확실하게 인정된 신강 남쪽 일부까지 주장하여 전통적인 '카슈미르'의 영역을 지칭하는 선으로는 쓰여도 국경에 관련해서는 쓰이지 않는다. 1897년 이 선의 영국 군관 존 알도 경의 제안으로 개정된 것이 오늘날 인도가 주장하는 카슈미르의 중인국경이다. 또한 1959년 이전까지 중국 또한 암묵적으로 인정하던 국경이다. 존슨 선의 개정 이후 만들어진 국경 제안이 한가지 더 있었으니 이것이 맥카트니-맥도날드 선이다. 1893년 중국의 카슈미르 국경 지도들을 건네받은 영국 당국은 아크사이친 지역을 약 반분하는 제안을 만들고 1899년 중국에 제안을 보내지만 답장을 받지 못하고 이 제안은 잊혀진다. 영국령 인도 당국 또한 기존의 개정판 존슨 선을 인도의 카슈미르 국경으로 간주한다. 1947년 인도의 독립 이후에도 인도는 존슨 선의 고수를 주장했으나 지역이 워낙 척박하니만큼 제대로 된 통제력을 발휘하지는 못한다. 1956년 이전 1950년대에 중국군이 아크사이친을 점거한 것으로 여겨지나 정확한 년도나 일자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전술한듯 이곳이 워낙 척박하여 중국이건 인도건 지배력을 발휘하지 못하였고, 1950년대 당시에 본 지역은 정확한 지도가 뜸했기 때문에 언제 중국군이 이 지역으로 넘어왔는지 불분명한 것. 아크사이친의 영토분쟁이 본격적으로 대두된 것은 1958년 중국 편찬된 중국의 공식 지도에서 아크사이친과 중국이 동시기 아크사이친에 건설한 티베트와 신장을 잇는 도로가 포함되면서다. 이 지도에서 중국의 아크사이친 점거를 확인한 인도는 중국 측에 항의를 하였다. 참고로 1958년 시점에 중국은 아크사이친 지역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하고 있지 않았다! 정확히는 카슈미르 방면에 중인국경에 대해 명확한 중국의 주장은 없었던 것. 이 영토 분쟁은 티베트 관련 분쟁과 함께 중인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따라서 1959년 중국은 60년동안 썩어가고 있던 전술한 맥카트니-맥도날드 선 제안을 승인하고[* 아크사이친 일부만 받는 국경이지만 신설한 티베트-신강 도로는 이 국경 상 중국령에 있었다.] 1960년엔 맥카트니-맥도날드 선도 파기, 모호한 일련의 구 청조시절 지도들을 바탕으로 아크사이친에 영토주장을 한다. [[1962년]] [[중인전쟁]]에서 중국이 승리하면서 중국의 아크사이친 점거는 굳혀졌고 오늘날까지 대치 상태로 이어진다. 2020년 6월 17일 갈완계곡에서 600명 규모의 난투극이 벌어져 인도군 20명 중국군 43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그런데 당시 중국측이 사용한 무기가 논란이 되고 있다.[[https://n.news.naver.com/article/005/0001333475|관련 기사]] 자세한 것은 [[2020년 중국-인도 국경 분쟁]] 문서 참조. [[분류:영토 분쟁 지역]][[분류:중국-인도 국경분쟁]][[분류:카슈미르]][[분류:신장 위구르 자치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