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케나톤 (문단 편집) == 사후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4127388497_6d41b4c4a9_b.jpg|width=100%]]}}} || || '''{{{#A0522D 고의적으로 훼손된 아케나톤의 형상}}}''' || 파라오 아케나톤의 치세 말년에 대해서는 딱히 알려진 바가 없다. 아마 [[스멘크카레]][* 아케나톤의 딸 메리타텐과 결혼한 사위.]나 아내 [[네페르티티]] 등이 함께 공동 [[섭정]]을 맡았을 가능성이 큰데, 이마저도 확실하지는 않다. 중동에서 기세를 떨치던 [[전염병]]이 이집트까지 번지면서 사회가 흉흉해졌고, 아케나톤을 비롯해 왕실에서 이를 다잡기 위해 온갖 애를 썼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어찌 되었든 아케나톤은 기원전 1336년[* 기원전 1334년이라는 말도 있다.] 재위 17년만에 사망했고, 그의 뒤를 이어 [[투탕카멘]][* 중간에 '[[스멘크카레]]'가 있는데, 이 또한 기록이 없어서 정체가 수수께끼에 싸여 있다. 투탕카멘의 형으로 보기도 하고, 왕비 네페르티티의 다른 이름으로 보는 설도 있다. 그리고 그 뒤에 '네페르네페루아텐(Neferneferuaten)'이라는 여성 파라오도 있는데 이 사람도 네페르티티 혹은 메리타텐(스멘크카레의 아내)과 동일 인물인지 아니면 스멘크카레와 동일 인물인지(스멘크카레가 여성이라는 가정 하의 주장) 혹은 Neferneferuaten Tasherit 공주인지 정체가 불확실하다. 일단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아케나톤이 투탕카멘의 [[장인어른|장인]]이라고 적어놓았다.]이 즉위했다. 종교 개혁의 구심점이었던 아케나톤이 죽자 아톤 신앙은 종말을 고했다. 기존의 신관들은 파라오가 죽자마자 어린 파라오 투탕카멘을 꼬드겨 아버지의 모든 행적을 부정하도록 만들었다. 원래는 투탕카멘의 이름도 아톤과 관련이 있는 '투탕카톤'이었으나 [[아문]] 신앙이 복귀하면서 '투탕카멘'으로 바꿨다. 야심차게 건설했던 신수도 아케타텐은 버려졌고, 모든 것은 아케나톤 이전으로 회귀했다. 특히 [[호렘헤브]]를 거쳐 19왕조가 들어서면서 아케나톤은 철저하게 이단아로 [[기록말살형|기록이 말살]]되었다. 19왕조를 제창한 [[람세스 1세]]부터가 전통 신앙을 부흥하고자 아톤 신앙을 대대적으로 말살한 인물이다. 아마르나에 있는 아케나톤의 묘로 추정되는 곳은 이름이 모두 지워져버렸고, 제19왕조 [[세티 1세]]의 신전에 있는 역대 파라오의 왕명록[* 흔히 "아비도스 왕명록"이라고 부른다. 세티 1세가 왕자인 후일의 [[람세스 2세]]에게 이집트의 역대 왕들을 이야기해주고 있다.]에서도 아멘호테프 3세에서 호렘헤브로 바로 넘어가는 것으로 되어 있다. 참고로 투탕카멘도 같이 잘렸다. 다만 투탕카멘의 경우는 일찍 사망했기 때문에 그다지 치세가 길지도 않았으며 삭제해봤자 대부분 내용들이 별다른 건더기가 없는 것들이라 어떤 의미로는 아버지보다는 그나마 나은 편(?)이라고 볼 수 있다. 수많은 파라오들이 있었지만 개중 후대의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아케나톤만큼 [[악마화]]되거나 부정당했던 파라오는 드물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사회의 핵심 기반인 종교를 건드렸으니 신관 계급에서 정말 철저하게 아케나톤을 역사 자체에서 지워버리기 위해 노력했던 것. 아케나톤이 심혈을 기울였던 신수도 아케타텐은 아케나톤이 죽자마자 버려졌다. 남아 있던 벽돌과 건축물들은 사람들이 다 헐어가 다른 데다 사용했고, 아케타텐은 신들에게 저주받은 곳으로 여겨지며 인적 없는 황무지가 되었다. 이집트 곳곳에 점점이 있던 아톤의 신전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아톤 신전들은 이단으로 파괴당했고 아톤 신관들은 지하로 숨어들거나 다시 전통 신앙으로 개종했다. 비석이나 건축물들에 새겨진 아케나톤의 부조나 이름은 모조리 지워졌고, 아케나톤은 심지어 역대 파라오들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조차 못했다. 특히 제18왕조 이후 들어선 제19왕조 시대에 이같은 경향이 가장 심했다. [[세티 1세]]. 그리고 [[람세스 2세]] 시절에 아케나톤과 후대 제18왕조 파라오들에 대한 박해가 대대적으로 일어났는데, 이쯤 되자 고대 이집트에서는 아케나톤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기시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이후 1907년 1월에 [[왕가의 계곡]] KV55 분묘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미라]]가 발견되었다. 처음에는 미라의 자세[* 일반적으로 파라오의 미라는 양손을 교차한 상태로 가슴에 올려져 있고 왕비의 미라는 왼손만 가슴에 올려져 있다. 이 미라는 왼손만 가슴에 올려져 있었다.]와 넓은 골반, 그리고 남성 성기가 없는 점 등을 보고 티이 왕비[* 티이의 경우 아멘호테프 3세의 할아버지 아멘호테프 2세의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정확히는 미확인 여성 미라였는데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나온 '티이'의 상자에서 발견된 머리카락과 대조한 결과 티이로 확인되었다.]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KV55의 발굴자인 시어도어 데이비스는 이를 '티이 왕비의 무덤'이라고 학계에 발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카이로]]에서 미라를 정밀 검사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알고 보니 여성이 아니라 젊은 남성의 미라라는 것. 남성치고는 골반이 크고, 두개골이 독특하게 생겼을 뿐만 아니라 작아서 여성으로 착각했다는 것이다.[* 초기에는 만성 [[수두증]]과 장애 때문에 두개골이 기형인 것으로 추측했지만 재조사한 결과 그냥 정상 두개골인데 모양만 조금 이상할 뿐이라고 한다.] 그 와중에 KV55에서 발견된 미라는 관의 얼굴이 심하게 파손되고[[http://en.wikipedia.org/wiki/File:KV55_sarcophagus_%28Cairo_Museum%29.jpg|(굉장히 음산하다)]] 카르투슈 안의 이름이 파내어져 있는 등[* 고대 이집트에서는 이름을 파괴하면 [[존재의 소멸|존재 자체가 없어진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단순한 저주나 [[기록말살형]]을 뛰어넘어 존재 자체가 완전히 잊히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훼손한 것이라는 의심이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 미라가 정확히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아케나톤 설, 스멘크카레 설, [[하트셉수트]] 설 등 다양했는데, 유골이 확실히 남성의 것이라는 점에서 하트셉수트는 가능성이 낮고[* 사실 하트셉수트는 [[2007년]] KV60 분묘의 미라가 하트셉수트의 것이라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는데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이와 관련된 프로그램을 제작해 방영하기도 했다.], 무덤 내부에서 조금 훼손되기는 했지만 분명히 아케나톤의 왕명을 새긴 진흙 벽돌 4개가 발견되어 미라가 아케나톤이라는 설이 힘을 싣던 추세였다. 결국 [[2010년]] [[투탕카멘]] 미라와의 [[DNA]] 감정 결과 '''아케나톤 본인의 것'''으로 판명되었으며 이에 따라 투탕카멘도 그의 아들로 확인되었다. [[http://media.daum.net/culture/others/view.html?cateid=1026&newsid=20100312115618578&p=yonhap|기사 링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