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이티 (문단 편집) ==== [[아이티 혁명]] ==== >오늘날까지도 아이티 학생이라면 누구나 [[투생 루베르튀르|루베르튀르]]가 [[프랑스 제1공화국|프랑스]]로 끌려가면서 남긴 마지막 말을 암송한다. “내가 무너진다면 [[생도맹그]]의 단 하나뿐인 자유의 나무는 쓰러지고 말리라. 그래도 자유의 나무는 다시 살아나 땅 속 깊이 수많은 새로운 뿌리들을 내리리니.” >---- > - [[놈 촘스키]], <507년 정복은 계속된다> 중 [[미국 독립 전쟁]]과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독립]] 분위기가 일찍 불거졌다. 미국 독립 전쟁 당시 [[자유]] [[흑인]]들은 [[프랑스군]]에 입대하여 미국 독립을 위해 싸웠다. 하지만 자유 흑인들은 군에서 활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지위가 계속 떨어지는 것을 눈 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결국 프랑스 혁명 초기 혁명주의자들이 만든 국회에 아이티도 의원을 보내게 되자 자유 흑인들은 자신들도 더 많은 정치적 영향력을 요구하여 [[백인]] [[지주|농장주]] 및 백인 [[빈곤층]]과 대립하였다. 그리고 결국 혁명이 시작하기도 전에 자유 흑인 vs 백인 농장주 vs 흑인 [[노예]] vs 백인 빈곤층 구도로 내전을 일으켰다. 또한 이를 배경으로 노예들도 불만이 폭발하게 되어 본격적인 혁명이 시작되었다. [[프랑스 제1공화국|프랑스 혁명정부]], 그리고 [[1799년]] 이후는 [[나폴레옹]]과 [[나폴레옹 전쟁|전쟁]] 중이던 [[영국군]]과 [[스페인군]]까지 [[자메이카]]와 [[도미니카 공화국|스페인령 산토 도밍고]]에서 아이티를 침략한 결과 자유 흑인, 백인 농장주, 백인 빈곤층, 프랑스군, 영국군, 스페인군이 진흙탕 전쟁을 시작한다. 흥미롭게도 이 세력들은 국가·인종에 기초한 대립 구도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영국]]과 스페인은 필요할 때는 [[아이티 혁명|아이티 혁명군]]과 손을 잡고, 아닐 땐 싸웠다. 백인 농장주와 백인 빈곤층도 마찬가지. 게다가 자유 흑인들과 흑인 노예들도 자주 싸웠다. 심지어 같은 노예들끼리 싸울 때가 잦았고, 아이티 흑인들은 나폴레옹이 본격적으로 진압을 시작하자 비로소 하나로 뭉치게 된다.[* 이 시기 나폴레옹이 흑인들을 향해 [[제노사이드]]를 선언했다거나 유황가스로 학살했다는 설이 나왔다. 다만 정설은 아니다.] 이때 프랑스군은 훨씬 더 좋은 무기를 가졌고 훈련도 잘 받았지만 흑인들의 [[유격전|게릴라전]]과 [[황열병]]을 이기지 못 한다. 당시 아이티에 프랑스 견제를 목적으로 파견된 영국군 23,000여 명 중 15,000여 명이 황열병과 말라리아로 사망했다. 프랑스군의 경우 65,000여 명 중 55,000여 명이 병사했다. 결국 식민지 전쟁에서 참패하고 [[프랑스인]]들은 흑인들의 보복이 두려워 죄다 본국으로 가거나 근처의 [[루이지애나]] 식민지로 배 타고 [[야반도주]]했다. 남아있는 백인들은 혁명 당시 의료적인 지원을 해줬던 [[아미시]]와 일부 [[의사]], 그리고 [[폴란드인]][* 프랑스에서 폴란드 독립을 위해 싸우던 폴란드인 군인들을 아이티로 파병했는데, 이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다른 이의 독립 운동을 탄압해야 한다는 환경 속에서 싸움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고, [[포로]] [[학살]] 명령에 항명하거나 아예 혁명군에 투항하는 등의 움직임을 보였다. 전후 이들은 명예흑인 지위를 수여받고 아이티에 정착하게 된다. 아이티 인구의 5%를 차지하는 [[흑백혼혈]]들 중 일부가 이들의 후손이다.] [[포로]]들 뿐이었다. [[파일:external/808e2c85b447bdc5e0e9ef15986b6ad918fe654efa61d13f68280de3ebfb9105.jpg]] [[투생 루베르튀르]](François-Dominique Toussaint Louverture, 1743년 5월 20일 ~ 1803년 4월 7일)[* 본명은 프랑수아도미니크 투생(François-Dominique Toussaint). 루베르튀르는 [[프랑스어]] L'Ouverture에서 유래하여 자신이 직접 붙인 [[성씨]]로, '[[시작]]'(ouverture. l'은 정관사)을 의미하며 여기서 더 나아가 '개척자'를 뜻한다.]는 아이티의 [[혁명가]], 흑인 [[독립운동가]] 중 하나로, [[노예제]]를 끝내고, 프랑스로부터 아이티의 독립 운동을 이끌었다. 또한 프랑스군의 [[장군]] 및 생도맹그의 [[총독]]으로도 지냈다.[* 투생은 노예로 태어났지만 혁명 이전에 주인이 그를 풀어줬기 때문에 자유민이었다. 그 이후 프랑스 식민지군에 들어갔고, 자유 흑인들과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교육을 받았다. 여담으로 그를 해방시켜줬던 주인은 투생이 봉기 전에 미리 언질을 줘서 해외로 도피시켰다고 한다.] 그의 노력으로 흑인 독립군은 아이티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군]]을 결국 무찔렀다. 그러나 투생은 어처구니없게도 프랑스군의 비열한 함정에 걸려 프랑스로 끌려가 옥사했다. 프랑스군 사령관이 투생에게 협상을 제안하자 투생은 '우리 힘을 보여줬으니 프랑스도 협상을 제대로 하겠지.' 라는 생각으로 프랑스군 진영으로 갔다가 갇힌 것이다. 대단히 비열한 짓거리였지만 투생이 흑인이라서, 그리고 프랑스에서 아이티에서 일어난 백인 학살을 과장해서 선전한 덕택에 비난하는 여론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이티 혁명군 수뇌부들도 자신들과 달리 투생이 아이티의 완전한 독립을 바라지 않아[* 투생이 프랑스 충성파였던 건 아니고, 당시 식민주의와 노예제가 가장 극렬한 곳이 카리브 해였다. 그런 상황에서 아이티가 프랑스와 완전히 연을 끊고 독립했다간 영국 등 다른 식민 제국들이 프랑스와 다를 바 없는 간섭을 펼칠 수도 있었다.] 어느 정도 대립하는 상황이라 함정인 걸 알면서도 프랑스군 진영에 가는 걸 안 말렸다. [[파일:external/thelouvertureproject.org/368px-Jean_jacques_dessalines_II.jpg]] 투생이 죽고 난 후 후계자인 [[장자크 데살린]](Jean-Jacques Dessalines, 1758년 9월 20일 ~ 1806년 10월 17일)에 의해 [[1804년]]에 독립하였으며 이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미국]] 다음으로 가장 빠른 것으로, 흑인이 수반이 된 흑인 주도의 근대적 정부가 구성된 것으로서는 최초의 사례이다. 아이티의 독립은 당초 나폴레옹의 계획이었던 [[북아메리카]] 재식민지화를 수포로 만들었다. 나폴레옹은 아이티에 노예제를 다시 도입하여 예전처럼 돈을 벌고 그 돈으로 [[7년 전쟁]]에서 잃은 [[퀘벡 주|퀘벡]] 등 [[북아메리카]] 식민지 전체를 재정복할 계획이었지만 오히려 아이티를 잃은 후 그나마 남아있던 루이지애나 식민지까지 포기하기로 한다. 당시 [[미국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은 이때 [[루이지애나 매입|루이지애나를 매입]]해 [[미국]]의 영토를 두 배로 늘린다. 아이티 혁명이 [[미국사|미국의 역사]]에도 큰 영향을 미친 셈[* 이후 미국이 [[텍사스 공화국|괴뢰국]]을 이용한 농간으로 [[멕시코 전쟁|멕시코까지 침략]]하고 [[멕시코인]]들을 학살하며 엄청난 영토를 확보하여 대자원을 확보하고 경제 최강국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이다. 아이티나 퀘벡 등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수복]]하기에는 너무 방어하기가 불리했고 루이지애나도 신생국 미국, 적성국가인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영국]]과 스페인 등에 둘러싸여서 방어가 곤란했다. 1804년 [[데살린]]은 아이티를 독립국으로 선언하여, 종신 총독직을 맡았다. [[1804년]] 데살린은 10월 6일 [[황제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나폴레옹 1세의 황제 즉위]]에 대항한다며 스스로 [[자크 1세(아이티)|자크 1세]]라 칭하고 [[아이티 제1제국|아이티 제국]]을 수립했다.([[아이티 제1제국]]) [[1805년]] 5월 20일 제국 헌법이 공포되고 [[농민]] [[군국주의]]적 국가가 되었는데 [[알렉상드르 페시옹|알렉상드르 사베 페시옹]](Alexandre Sabès Pétion)과 [[앙리 크리스토프]] 등의 경쟁자들은 이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황제]]를 자칭했던 데살린은 옛 동지였던 [[군주국의 공화주의|공화파]]에 의해 [[암살]]되었다. 그는 [[1806년]] 10월 17일 [[포르토프랭스]] 북쪽의 한 도시에서 반란군에게 붙잡혀 살해되었고, 그의 시체는 잘려져 근처에 묻혔다. 이후 반란의 주역인 알렉상드르 페티옹과 앙리 크리스토프가 반목하면서 아이티는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페티옹과 크리스토프는 [[국가원수]] 자리를 놓고 대립하다가 각각 남부와 북부에서 (남)[[아이티 제1공화국|아이티 공화국]]과 (북)[[아이티국]]을 선포하고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들이 세운 정부는 최초의 흑인 근대 공화정부라는 의의가 있었으나 두 개의 정부, 두 명의 대통령이 등장하여 남북 분할이 야기되었다. 이후 [[1811년]]에 앙리 크리스토프가 스스로를 [[앙리 1세(아이티)|앙리 1세]]라 칭하고 [[왕]]으로 즉위하면서 아이티국은 [[아이티 왕국]]으로 전환되어, 북부의 왕국과 남부의 공화국이 대립하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앙리 크리스토프는 자신의 측근들에게 [[귀족]] [[작위]]를 하사하며 왕 노릇을 했고, [[프랑스 식민제국|프랑스]]의 침공을 막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라페리에르 요새를 건설하며 권위를 과시했다. 그러나 자신이 세운 공화정을 스스로 뒤엎고 [[아이티 왕국|왕정]]을 수립한 행위는 다수의 민중이 그에게 등을 돌리고 [[아이티 제1공화국|남부의 공화국]]을 지지하는 현상을 야기했다. 그리하여 말년의 앙리 크리스토프는 자신의 백성들이 언제 남부와 손잡고 반기를 들지 두려워하며 살다가 [[1820년]]에 [[권총]]으로 [[자살]]했다. 이후 그의 아들 자크 빅토르 앙리가 왕위를 계승했으나, 불과 며칠만에 남부의 지원을 받은 반란군에게 살해당했고, 남부의 대통령 장피에르 부아예(Jean-Pierre Boyer)가 [[아이티 제1공화국|통일 아이티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남)아이티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자 앙리 크리스토프의 [[라이벌]]이었던 알렉상드르 페티옹은 [[1818년]]에 사망했고, 그의 유언에 따라 부아예가 대통령직을 승계한 상태였다.] 한편 이렇게 남북으로 분단된 동안에도 아이티는 [[그란 콜롬비아|누에바 그라나다]] 독립운동을 하던 [[시몬 볼리바르]]에게 병력을 지원하면서[* 볼리바르는 페티옹의 남부 정권에게 병력을 지원받았다.] 뜻밖에 [[남아메리카]]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에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겨우 안정화된 아이티는 [[설탕]]과 [[커피]] 등 [[수출]]길이 막혀서 계속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혁명 과정에서 아이티에서 설탕과 커피 등을 수출하던 백인들이 거의 다 죽거나 도망갔는데, 아이티 독립 운동 세력은 [[농장]]을 운영하는 법은 알았지만 생산품을 수출하고 거래하는 법에 미숙했다. 그리고 서구 국가들이 이들과 순순히 정직하게 [[무역]]을 해준다는 보장도 없었다. 아이티는 독립하자마자 가난한 나라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흑인들은 [[자유]]를 쟁취했지만 당시 서구 국가들은 이들이 자유를 만끽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