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우렐리아누스 (문단 편집) ==== [[팔미라 제국]] 정복 ==== 272년,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등 로마 제국의 동방 영토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팔미라 제국의 여왕 [[제노비아]]는 로마의 곡물 수출을 중단했다. 이로 인해 로마는 몇주 만에 빵이 바닥나 기근의 위협을 받았다. 이에 아우렐리아누스는 팔미라 제국을 정복하기로 결심했다. 제노비아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그녀는 자신이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후예라고 주장했고 그 유명한 [[클레오파트라]]와 자신을 비교했다. 하지만 제노비아의 용기와 군사적 역량은 클레오파트라를 능가했다. 그녀는 사냥을 즐겼고 군복을 입고 말을 탔으며 필요한 경우에는 부대 맨 앞에 서서 도보로 수 킬로미터를 행군했다. 아우렐리아누스 이전에도 여러 로마 장군과 군대가 팔미라 제국을 제압하기 위해 접근했으나 제노비아는 그들을 쉽게 격파했다. 또한 제노비아는 행정 능력도 탁월하여 엄격한 절약 정책을 실시해 재정을 풍족하게 관리하면서도 꼭 필요한 경우에는 관대하게 베풀었다. 그리고 사산조 페르시아와 동맹을 체결하고 위급 시에는 지원군을 파견하기로 약조했다. 아우렐리아누스가 군대를 이끌고 아시아로 진군하자, 제노비아는 이에 맞서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다. 하지만 아우렐리아누스는 그녀가 그동안 만난 상대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는 로마 군대의 맨 앞에서 진군하여 안키라[* 지금의 [[앙카라]]]를 함락시켰으며 끈질긴 공성전 끝에 티아나를 공략했다. 이때 티아나 시민들은 공포에 사로잡혔지만, 아우렐리아누스는 자신은 복수할 생각이 없으며 그들에게 손대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는 칙령을 내려 그들을 안심시키고 도망자들을 도시로 불려들었다. 이때 한 가지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티아나 공성전이 생각보다 쉽게 진행되지 않자, 아우렐리아누스는 열받은 나머지 "도시를 함락하면 개 한 마리도 살려주지 않겠다."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막상 도시가 함락되자 생각을 바꿔 주민들을 해코지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자 병사들이 앞서 한 약속을 잊었나며 항의했다. 이에 아우렐리아누스는 "내가 개 한 마리도 살려주지 말라 한 건 사실이다. 그러니 개를 죽여라!"라고 답했고, 병사들은 박장대소하며 기분을 풀었다. 그 후 아우렐리아누스는 관대하게 대해야 하는 이유를 잘 설명하며, 전쟁에서 이기면 충분한 보상을 해주겠다고 약속했고, 병사들은 기꺼이 따랐다고 한다. 아우렐리아누스는 여기에 더해 자의가 아닌 강요에 의해 팔미라 여왕의 병사로 근무했던 자들에게 대사면령을 내렸다. 이러한 관대한 조치는 시리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로마군은 에메사의 성문 앞에 이르기까지 백성들의 호응을 얻었다. 272년 6월, 로마군과 팔미라군은 안티오키아 근방과 에메사 근처에서 두 번에 걸쳐 격돌했다. 제노비아는 두 번의 전투 모두 참전해 병사들을 독려했고, 부하 [[자브다스]]도 탁월한 군략을 보였지만, 아우렐리아누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결국 두 차례 전투 모두 패한 제노비아는 팔미라로 도주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프로부스]]를 이집트로 파견해 로마의 밀 공급지인 이집트를 확보함으로서 로마의 빵 부족 현상을 해결하게 한 뒤 본인은 팔미라를 포위했다. 제노비아는 팔미라에서 항전하면서 자신의 목숨이 붙어 있는 한 통치를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아우렐리아누스는 팔미라 공성전에서 친히 전열의 맨 앞에 서서 군대를 지휘하다가 창에 맞아 부상당했다. 이 시기 그는 원로원에 서신을 보내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로마인들은 여자에게 놀림을 당하고 있다며 나를 바보로 여기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제노비아의 성격과 위엄을 모르는 자의 말이다. 그녀가 전쟁을 위해 준비한 돌, 화살, 그리고 각종 원거리 무기의 종류를 모두 열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벽의 모든 구역에 두세 개의 발리스타가 설치되었으며, 그녀의 군용 무기에서 인위적인 불이 뿜어지고 있다.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그녀를 필사적인 용기로 무장시켰다." 아우렐리아누스는 관대한 항복 조건을 제노비아에게 제안했지만 제노비아는 모욕적인 언사와 함께 거부했다. 그녀는 곧 기근이 돌아 로마군이 사막 지대에서 퇴각할 것이며 사산조 페르시아의 군대가 지원하러 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아우렐리아누스는 탄탄한 보급로를 확보해 병사들의 사기를 유지시켰고 사산조 페르시아는 마침 [[샤푸르 1세]]가 사망하는 바람에 팔미라에게 대규모 병력을 보낼 여력이 없었으며, 그나마 보낸 소수의 병력은 아우렐리아누스가 급파한 기병대에게 격퇴되었다. 얼마 후 프로부스가 이집트 평정을 완료한 후 아우렐리아누스와 합류하자, 더이상 버틸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제노비아는 가장 날랜 낙타에 올라타 달아났다. 그러나 그녀가 유프라테스 강둑에 도착했을 때 로마군에게 생포되어 아우렐리아누스에게 끌려왔다. 팔미라는 곧 항복했고 아우렐리아누스는 특별히 약탈을 금지했다. 그 대가로, 팔미라는 막대한 양의 황금과 무기, 말, 낙타, 비단, 보석을 헌납해야 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팔미라에 600명의 병력을 남기고 에메사로 돌아가 승전에 따른 포상과 징벌을 실시했다. 이때 그는 제노비아에게 어떻게 로마의 황제들에게 감히 맞서 싸울 생각을 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제노비아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아우레올루스]]나 [[갈리에누스]] 같은 사람을 로마 황제라고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폐하만을 나의 정복자, 나의 주군으로 인정할 뿐입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제노비아를 로마로 끌고 가 개선식에 참석시키게 한 뒤 자신 역시 귀국길에 올랐다가 도나우 강을 건너 약탈을 자행하고 있던 사르마티아인들을 토벌했다. 그런데 273년, 팔미라에서 반란이 일어나 제노비아의 친척인 [[셉티미우스 안티오쿠스]]를 황제로 추대하고 600명의 수비대가 몰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반란자들은 처음에는 메소포타미아 총독 마르켈리누스를 황제로 옹립하려 했지만, 마르켈리누스가 이 사실을 아우렐리아누스에게 알리자 안티오쿠스를 황제로 내세웠다.] 이에 아우렐리아누스는 급히 군대를 이끌고 팔미라로 진군해 단숨에 함락시키고 도시를 사흘간 [[약탈]]하는 걸 허용했다.[* 참고로 고대와 중세 전쟁에서 흔히 일컫는 약탈이란 단순히 물건을 빼앗는 정도가 아니라, 군사들이 도시 안으로 들어가서 주민들을 상대로 마구잡이로 학살과 방화를 저지른다는 것을 의미했다. 고대 그리스의 전쟁을 다룬 문헌인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읽어보면, 고대 전쟁의 [[약탈]]이 얼마나 잔인하고 무자비했는지가 생생히 묘사된다.] 이때부터 동방에서 번영하는 도시였던 팔미라는 쇠퇴했고 나중엔 촌락으로 전락했다. 한편, 이집트에서는 피르무스라는 인물이 반란을 일으켜 로마에 대한 밀 공급을 또다시 끊었다. 이에 아우렐리아누스는 이집트로 진격해 반란을 몇 주만에 평정하여 이집트의 소요를 잠재웠다. 이렇듯 동방 질서를 회복한 공적으로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동방의 재건자'''라는 뜻의 '''레스티투토르 오리엔티스'''(Restitutor Orientis) 칭호를 수여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