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우랑제브 (문단 편집) ===== 무굴-마라타 전쟁 ===== [[파일:Aurangzeb-faces-Sudhakar.jpg]] 마라타인들은 [[마하라슈트라]] 지방에 살던 인도-아리아계 민족으로, [[힌두교]]를 신봉했다. 당연히 전 인도의 이슬람화를 주창하던 무굴 제국과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관계였던 것. 당시 마라타인들은 수는 많았지만 강력한 구심점이 없었다. 하지만 상황은 마라타인들의 영웅 [[시바지 본슬레]]가 등장하며 뒤집힌다. 시바지 본슬레는 일단 인근의 약화된 비자푸르 술탄국을 공격했다. 술탄 아딜 샤는 그를 막으려 했지만 [[게릴라]] 전술을 활용했던 시바지를 막기에는 무리였다. 시바지 본슬레는 비자푸르의 요새들을 함락하고 그 안에 쟁여져 있던 무기와 대포들을 활용해 군대를 재정비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비자푸르의 무기로 무장한 마라타 군대는 강력한 군대로 변모했다. 시바지 본슬레는 뿐만 아니라 제 영토 내에서 힌두교도들을 탄압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며 힌두교도 대부분의 인기를 얻었고, 훗날 비자푸르 술탄국이 무굴 제국에 무너진 이후에도 여전히 세를 불리면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의 최종 목표는 무굴 제국의 세력을 남인도에서 축출하고 힌두교 제국을 건국하는 것이었다. 시바지 본슬레의 군대가 갈수록 커지자 아우랑제브는 1659년 샤이스타 칸[* 아우랑제브 황제의 삼촌이기도 했다.]을 파견해 본슬레를 꺾고 잃어버린 요새들을 탈환하라 시켰다. 샤이스타 칸은 푼 지방에 자리를 틀고 진지를 차렸는데, 그가 총독의 결혼식 연회에 참여하던 도중 시바지 본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야습하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사로잡히고야 말았다. 본슬레는 샤이스타 칸의 아들을 그가 보는 앞에서 죽여버렸고 샤이스타 칸의 손가락 3개를 잘라 모욕한 다음 그를 추방했다.[* 샤이스타 칸은 이후에도 죽지 않고 아삼 지방으로 원정을 떠나는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아우랑제브는 샤이스타 칸이 실패하자 이번에는 라자 자이 싱을 보냈다. 라자 자이 싱은 본슬레에게 신변의 안전을 보장할 테니 아그라에서 아우랑제브를 알현하기를 요청했고, 본슬레는 이를 받아들였다. 허나 회담에서 본슬레가 황실 예법을 무시하는 등 아우랑제브를 노하게 만들었고, 잠시 구금되어 죽을 위기를 맞았으나 간신히 탈출에 성공한다.[* 이때 아우랑제브가 본슬레를 죽였다면 훗날 [[마라타 제국]]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그라에서 도망쳐나온 본슬레는 [[데칸 고원]] 일대로 돌아가 1674년 스스로 '차트라파티'로 선포하고 [[마라타 동맹]]을 창설한다. ||[[파일:220px-Shivaji_British_Museum.jpg|height=300]]||[[파일:malhar-rao_190517-064032.jpg|height=300]]|| || [[시바지 본슬레]] || 마라타 경기병 || 힌두 왕국을 건국한 본슬레는 1680년에 죽을 때까지 활발히 전쟁을 벌이며 무굴 제국과 맞서 싸웠다. 안그래도 무굴 제국과 이슬람을 싫어하던 남인도의 힌두교도들은 열성적으로 마라타 동맹을 도왔고 무굴 제국의 남인도 영향력은 갈수록 사그라들었다. 시바지 본슬레의 뒤를 이은 샴바지 본슬레 역시 무굴 제국의 군대를 남인도 지방에서 몰아내는 데에 열심이었다. 그와중에 아우랑제브의 아들이었던 악바르[* 물론 그 [[악바르 대제]]와는 조상과 후손 관계이다.]가 몇몇 신하들과 반란을 일으켜 데칸으로 도망쳤다. 스스로 아버지를 쫒아내고 황제가 되었기에 누구보다 후계자들의 위험성을 알고 있던 아우랑제브는 직접 군대를 소집해 악바르를 쫒아갔고, 악바르는 상황이 불리해지자 결국 마라타 동맹에 투항한다.[* 이후 마라타 동맹마저도 아우랑제브에게 패하자 이젠 [[페르시아]]까지 도망가서 아버지가 죽을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다가 자신이 먼저 죽었다.] 1689년에는 아우랑제브의 군대가 샴바지 본슬레를 사로잡아 죽이는 데 성공했지만 후임 라자람 1세 등이 끊임없이 저항해대는 통에 남인도는 조용해질 날이 없었다. 마라타 동맹은 계속 무굴 제국의 발목을 잡았고, 무굴 제국은 막대한 전비를 들여가며 이를 진압해야 했다. 무굴 제국이 마라타 동맹을 상대하기 까다로워하던 가장 큰 이유는 마라타 동맹에 핵심적인 중앙 지도부가 부재했기 때문이다. 이전 [[골콘다]]나 [[비자푸르]] 등은 강력한 술탄이나 중앙정부가 존재해 이들의 머리만 날리면 지역을 정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라타 동맹은 아무래도 여러 마라타 부족들의 연합체에 가깝다보니 부족들 하나하나를 모조리 처리해야만 했기 때문. 아우랑제브가 남하하면서 본슬레 가문의 수도였던 사타라마저 함락시켰지만 마라타인들은 오히려 무굴 제국의 측면인 동쪽 말와나 [[하이데라바드]] 등지를 파고들거나 수라트 항을 공격하며 아우랑제브를 위협했다. 게다가 무굴 제국이 위에서 내려오는 것을 막아내는 동시에 인도 대륙 남쪽 끝으로 남하하면서 [[타밀나두]] 등지의 소왕국들을 정복하면서 힘을 길렀고, 아우랑제브는 마라타인들과 전쟁을 치르느라 20년 동안 데칸에서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야했다. 그는 남인도에서 무굴 군대 전체의 5분의 1 가량을 소모했고 심지어 88세라는 고령에 죽을 때까지 마라타인들과 죽고죽이는 삶을 살았다. 27년의 무굴-마라타 전쟁 동안 무굴 제국은 점차 황폐해졌고,[* 전쟁에 들어간 엄청난 양의 전비를 충당하기 위해 세금이 극도로 높아졌다.] 늙은 황제가 데칸에 정신이 팔린 사이에 점차 각지에서는 반란의 기운이 감돌았다.[* 27년 간의 전쟁 동안 대략 250만 명의 전사자가 발생했고 200만 명에 달하는 일반 백성들이 전쟁 때문에 일어난 [[기근]]과 [[가뭄]]에 굶어죽었다. 이는 결국 무굴 제국의 붕괴를 촉진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