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우랑제브 (문단 편집) ==== 군사 원정 ==== [include(틀:근대 인도의 정복 군주)] [[파일:external/scottkaciuba.weebly.com/274234_orig.jpg]] 주황색 영토가 아우랑제브가 새로 정복한 영토다. 그렇게 웬만한 인도 왕국들은 모조리 쓸어버리고 굴복시키면서 아우랑제브 대의 무굴 제국은 거의 완전한 인도 통일을 이룩하고 평화를 구가하…지 못했다. 아우랑제브의 정복 사업이란 게 애초에 정복지를 정식으로 행정구역으로 통합하고 황제가 임명한 지방관이 내려가 대리통치하는 게 아니었고, 대신 일단 토착 왕을 굴복시킨 뒤 충성 맹세를 받아내는 식이었다. 즉 토착 왕들이나 토후들이 계속 그 지방을 통치한다는 뜻이었다. 당연히 토후들은 자신을 강제로 무릎꿇린 무굴 제국에 반감을 가질 수 밖에 없었고, 무굴 제국이 조금이라도 약화되는 모습을 보이면 바로 들고 일어나 독립을 선포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무굴 제국은 [[악바르]] 시대의 관용적인 종교 정책에서 벗어나 친무슬림적인 성향이 가속화되고 있었다. 점차 무굴 제국이 이슬람화되어가자 [[힌두교]] 신자, [[시크교]] 신자, [[자이나교]] 신자 등 다양한 종교인들이 반발하기 시작했고 이들이 하나하나 반란을 일으키면서 아우랑제브는 허구한 날 반란을 진압하러 다녀야 했다. 아우랑제브는 독실한 무슬림 신자로서 인도 전체를 이슬람화시키려 했다. 그래서 추진한 핵심 정책이 바로 [[지즈야]], 비무슬림들에게 매기는 [[인두세]] 정책이다. 당연히 엄청난 반발이 일어났고, 1669년에는 마투라의 힌두 사원이 파괴된 것을 계기로 [[힌두교]]를 믿는 [[자트족]]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1670년에 이르자 반란군이 급격히 불어나 2만에 달하는 반란군들이 지방 토후 고쿨라의 지휘 하에 무굴 제국에 본격적으로 전쟁을 벌였다. 아우랑제브는 1년도 되지 않아 농민군들을 무찔렀고 고쿨라는 목을 베어 처형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고쿨라의 아들 라자 람 자트가 또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특히 라자 람 자트는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 '''악바르의 무덤과 타지마할을 도굴'''했다. 악바르는 이 때문에 죽은 후에도 [[부관참시]]를 당해야 했고, 그의 뼈는 시가지에 질질 끌려다닌 후에 불태워졌다. 또한 타지마할의 은으로 만들어진 문짝을 녹여 약탈해가기까지 했다. 격노한 아우랑제브는 대군을 동원해 반란군을 공격했다. 1668년 7월에 반란은 진압되었고 라자 람 자트의 목은 아우랑제브 앞에까지 배달되었다고.[* 참고로 아우랑제브 사후 자트 농민들은 또다시 반란을 일으켜 독립해 떨어져나갔다.] 한창 아우랑제브가 계승 전쟁을 치르고 있을 무렵에 [[아삼]] 주의 힌두 왕국들이 무굴 제국이 혼란한 틈을 타 [[벵골]] 지방으로 쳐들어왔다. 3년 동안은 무굴 제국을 정리하느라 여유가 없어 이들을 가만 놔두었지만, 아우랑제브의 황위가 확고해지자 1660년 벵골 총독 미르 줌라 2세가 이 영토를 되찾기 위해 전쟁을 선포했다. 1661년 11월에 무굴 제국군이 아삼으로 진군했고, 1662년 3월에는 아삼 왕국의 수도였던 가르가온을 함락했다. 가르가온에서 82마리의 코끼리, 30만 루피의 보물, 1,000여 척의 함선, 173개의 창고량에 달하는 식량 등 어마어마한 전리품을 약탈한 무굴 제국은 이후 아삼 지방에 총독을 임명한 채로 원정을 중지하고 얻어낸 영토를 굳히기에 나섰다. 무굴 제국은 1671년 치러진 사라이가트 전투에서는 아삼 군대에게 패배했지만 지방에 대한 통치력만큼은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11년 후에 또다시 일어난 이탁훌리 전투에서는 아삼 군대에게 쫒겨나며 아삼 지방의 독립을 사실상 용인한다. 이후 무굴 제국은 더이상 [[벵골]] 지방 동쪽으로 영토 확장 시도는 하지 않는다. 종교인들이 전쟁을 일으키는 경우도 흔했다. 1672년 5월에 사트나미교를 믿는 북인도 농민들이 봉기해 무굴 제국의 심장부인 북인도 지방에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사트나미 신자들은 자신들이 무적이라 생각했고 심지어 [[분신술]]을 쓸 수 있다고 여겼다. 초기에는 소수로 돌아다니던 무굴 군대를 격파하며 승승장구했지만 놀란 아우랑제브가 1만 명의 대군을 보내 쓸어버리면서 얼마 가지 않아 잠잠해졌다. [[시크교]] 신자도 반란을 일으켰다. 아우랑제브의 강제적인 개종 정책에 반발한 시크 [[구루]] 테흐 바하두르는 아우랑제브더러 만약 자신을 개종시킨다면 제 아래 신자들도 개종시키겠다고 서한을 보냈다. 이 서한을 받아본 아우랑제브는 테흐 바하두르를 끌고와 혹독한 고문을 하면서 강제로 개종시키려 들었다. 개종 시도는 실패했고 구루는 목이 잘렸다. 종교 지도자를 이따위로 대해놨으니 시크교도 사이에서 아우랑제브에 대한 반감이 맥스를 찍는 건 당연지사. 결국 아우랑제브가 죽기 8년 전인 구루 고빈드 싱이 1699년에 반란을 일으켰다.[* 구루 고빈드 싱은 말년의 아우랑제브에게 그의 잔인함과 무도함, 그리고 그가 자비로운 알라의 뜻에 정면으로 반하고 있다고 고발하는 서한을 보냈다. 신실한 아우랑제브는 그 서찰을 읽고 꽤나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결국 이는 [[시크 왕국]]의 창설로 이어진다. 1672년에는 [[파슈툰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의 이유는 [[카불]]에 주둔하던 무굴 병사들이 파슈툰 부족의 여인들을 성추행했기 때문. 한 부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안그래도 무굴 제국의 막대한 세금 때문에 불만이 많았던 아프간계 부족들 거의 대부분이 통째로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아프가니스탄 지방의 총독이던 아미르 칸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무굴 대군을 이끌고 아프가니스탄으로 진입했지만, [[제국의 무덤]]이라 불리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처참히 깨져서 그를 포함해 겨우 4명만이 살아돌아왔다고 한다. 격분한 아우랑제브는 대군을 이끌고 직접 쳐들어갔다. 그는 [[청야전술]]을 사용해 아프간 지방 전부를 불태워버렸고 헛소문을 퍼뜨려 부족들 간의 불화를 유도했다.[* 이 때문에 아프간 부족들은 서로를 불신하게 되었고 이는 근현대까지 아프가니스탄에 제대로 된 중앙정부가 세워지지 못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친다.] 아우랑제브는 혹독한 탄압으로 파슈툰인들을 찍어누르는 데에 부분적으로 성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력이 예전같지 않던 무굴 제국이 이전처럼 아프간 일대에 확고한 장악력을 행사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주요 교역로 일대와 대도시들을 제외하면 아프가니스탄 지역은 거의 독립적으로 떨어져나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