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우랑제브 (문단 편집) === 유년 시절 === 아우랑제브는 1618년 11월 [[구자라트]]에서 황제 [[샤 자한]]과 황후 [[뭄타즈 마할]] 사이에서 샤 자한의 3남으로 태어났다. 1626년 6월에 아버지 샤 자한이 당시 황제이자 할아버지인 [[자한기르]]를 상대로 일으킨 반란을 실패한 후,[* 샤 자한은 이때 이미 비공식적인 황위 계승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하지만 자한기르가 총애하던 후궁 누르 자한이 옆에서 살살 자한기르를 꼬드겨 자신을 제치고 다른 사람을 황제에 올릴까 두려워한 샤 자한이 반란을 일으켰던 것.] 당시 8살이었던 아우랑제브는 형인 다라 시코 황자와 함께 [[라호르]]에 사실상의 인질로 잡혀갔다. 얼마 지나지 않은 1627년에 자한기르가 승하하자 샤 자한은 무굴 제국의 제5대 황제로 즉위했고, 포로에서 황자이자 공식 후계자들 중 하나로 신분이 격상된 아우랑제브는 [[아그라]]에서 샤 자한과 재회했다. 이후 아우랑제브는 궁정 교육을 받으며 훌륭히 성장했고, [[페르시아어]], [[튀르크어]], [[힌디어]] 등 다양한 언어에 유창했다. 1633년 5월에는 궁궐로 쳐들어온 코끼리를 창으로 때려 제압하며 아버지 샤 자한으로부터 용감한 자라는 뜻의 '바하두르'라는 칭호와 20만 루피를 하사받았다.[* 후일 아우랑제브는 회고록에서 '내가 그때 그 코끼리에게 죽었다고 해도 전혀 부끄럽지 않았을 것이다. 죽음은 황제조차 피할 수 없는 것이니 죽음 자체는 전혀 부끄럽지 않다. 정말 부끄러운 것은 내 아우들이 코끼리 앞에서 도망쳤다는 것이다!'라고 썼다. 그의 성격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일화.] 성인으로 성장한 아우랑제브는 어릴 적부터 이미 군사 분야에는 천재적일 정도의 재능을 보였다. 1635년 오르차 지역의 군주 주자 싱이 반란을 일으키자 샤 자한은 아우랑제브에게 경험을 쌓아줄 겸 그를 명목상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직접 군사를 지휘하기에는 너무 어렸기에 아우랑제브는 실무를 맡은 장군들이 오르차 요새를 공성하는 동안 뒤에서 지켜보며 군대 운용에 대한 경험을 쌓았다. 원정은 성공적이었고 이 때의 경험은 아우랑제브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후 아우랑제브는 1636년에는 데칸의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한창 데칸 지방을 휩쓸던 아마드나가르의 무르타자 샤 3세를 굴복시키고 무굴 제국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1637년에는 19살의 나이에 [[사파비 왕조]]의 공주였던 딜라스 바누 베굼과 혼례식을 올렸다.[* 딜라스 바누 베굼은 그의 첫 번째 아내이자 그가 가장 사랑하던 황후이기도 했다.] 그렇게 아우랑제브는 데칸 지방을 성공적으로 제압하면서 성공가도를 달리는 듯 했지만..... 시련은 예상보다 일찍 찾아왔다. 1644년에 그의 누이이자 샤 자한이 가장 사랑하던 딸 자하나라 공주가 향유에 불이 붙어 화상을 입었는데, 이에 슬픔에 빠진 황제가 직접 딸을 보살피며 모든 황족들에게 총소집령을 내렸던 것이다. 곧바로 수 천명의 신하와 황족들이 모여 자하나라의 쾌유를 빌었다. 하지만 그와중에 아우랑제브는 소식을 전해들었음에도 무려 3주 동안이나 꾸물거리다가 수도 아그라로 귀환했다. 군장을 차려입고 꺼드럭대며 황궁에 들어오는 아우랑제브를 본 샤 자한은 격노했다. 그는 바로 아우랑제브의 데칸 총독직을 박탈해버렸고, 아우랑제브가 군대에서 무굴 황제의 인장과 깃발, 그리고 천막을 사용할 권리마저 빼앗아버렸다. 아우랑제브에게는 최악의 형벌이었던 셈.[* 이게 정설이지만 독실한 [[수니파]] 무슬림이었던 아우랑제브가 무소유를 선언하자 샤 자한이 어이없어하며 총독직도 같이 뺏어버렸다는 소문도 있다.] 그렇게 아우랑제브는 벌로 7개월 동안 궁정에 연금되어있다가, 1645년 [[구자라트]]의 [[나와브]]로 임명되었다. 아우랑제브는 심한 친무슬림 행보 때문에 일부 종교 갈등을 미숙하게 처리하긴 했지만 이미 데칸 총독으로 재임하며 쌓은 행정경험 덕에 아우랑제브는 구자라트를 훌륭히 통치했다. 아우랑제브가 구자라트를 잘 다스리자 샤 자한은 그를 1647년 [[아프가니스탄]]의 발크 지방으로 보냈다. 당시 발크 지방은 [[우즈베크인]]들이 하도 찝적대는 통에 샤 자한의 속을 썩이고 있었는데, 아우랑제브 이전에 그 곳을 관리하던 무라드 바크쉬 황자가 대응이 미숙했기에 아우랑제브를 믿고 그 곳에 보낸 것. 하지만 아우랑제브도 뾰족한 수는 없었다. 우즈베크인들은 무굴 군대 못지 않은 엄청난 정예병들이었고 오랜 싸움을 벌였지만 결과는 무승부였다. 우즈베크 군대는 [[게릴라]]를 펼치며 아우랑제브를 압박했고, 무굴 제국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막대한 전비만을 지출한 채 후퇴했다. 아우랑제브의 군사적 실패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샤 자한은 이후 [[물탄]]과 [[신드]]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는 [[사파비 왕조]]가 [[칸다하르]]가 침공했을 때 군대를 이끌고 칸다하르를 수복하려 했지만. 겨울이 오면서 어쩔 수 없이 칸다하르 회복의 꿈을 접고 후퇴했다.[* 아우랑제브의 역량 부족이 문제는 아니었다. 당시 칸다하르 지방의 척박한 교통로와 추운 날씨 때문에 제대로 진군하지 못했던 탓이 크다. 아우랑제브의 형이었던 다라 시코도 마찬가지로 실패했다.] 아우랑제브는 다시 데칸 총독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1652년 아우랑제브가 다시 돌아갔을 무렵, 데칸 지방은 이전과는 비교도 힘들 정도로 척박해진 상태였다. 행정구들은 하나같이 빈곤하기 짝이 없었고 제압해놓은 봉신국들은 정해진 공납금도 내지 않고 중앙 정부의 말도 듣지 않았다. 아우랑제브는 유능한 관료 무르시드 무리 칸을 데려와 북인도의 세법을 데칸 지방에 그대로 적용했다. 덕분에 데칸의 재정 상황은 흑자로 돌아섰고 사회는 다시 안정세로 접어들었다. 또한 비자푸르 술탄국을 공격해 막대한 배상금을 뜯어내고 데칸을 안정시키는 공로도 세웠다.[* 다만 여기서 아우랑제브는 샤 자한과 그의 황태자 다라 시코에게 크게 실망한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완전히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는데 샤 자한이 중지를 명했던 것. 호전적인 아우랑제브는 이를 이해할 수 없었고 이 명령 뒤에 유화적인 성격이던 다라 시코가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아우랑제브 덕분에 [[데칸 고원]] 지대에 무굴 제국의 영향력은 다시 확고히 자리잡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