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우랑제브 (문단 편집) == 평가 == 위대한 정복군주, 그러나 무리한 확장과 종교 탄압으로 제국의 멸망을 불러온 황제로 평가받았으나 최근에는 재평가받고 있다. 아우랑제브 개인은 독실한 무슬림[* 보석상인이자 여행가인 장 바티스트 타베르니에가 증언한 바에 따르면 호랑이 가죽을 덮고 땅바닥에서 잘 정도로 고행에 열중했다고 하며, 일과가 단순하고 경건하며 엄격했다고 한다. 그리고 화려한 무굴의 궁중생활보단 반복적인 군사원정의 삶을 좋아했다고 한다. 실제로 황제 자신은 장신구가 칼 밖에 없을 정도로 검소했다.]이자 뛰어난 학식과 군사적 재능을 지닌 [[영웅]]이라 할 만한 인물이었다.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국무를 보다가 밤늦게 잠에 들었고, 스스로도 굉장히 검소한 생활을 하는 등 분명 신념과 능력만큼은 확실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치세 후반기에 들어가며 국가경영과 자신의 종교관을 분리시키지 못한 것이 최대 실책이라 평해진다. 인도는 [[힌두교]], [[이슬람]], [[시크교]], [[불교]], [[자이나교]] 등 주요 종교들 외에도 지역별로 군소 종교와 [[기독교]],[* 중세 초기 인도로 이주해 독자적 종파를 세운 [[네스토리우스]] 계열 사도 토마스 교회 및 [[고아]] 지역을 비롯한 유럽 식민 제국들의 정복을 통해 [[가톨릭]] 포교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자세한 내용은 [[시로말라바르 가톨릭]], [[말랑카라 시리아 정교회]] 문서 등 참조] 심지어 소수의 [[유대인]]들까지 온갖 종교와 문화가 난립한 땅이었다. 그러나 아우랑제브는 제위 후반기에 벌인 지나친 이슬람 우대 정책으로 제국의 화합을 위해 노력한 선제들의 노력을 무너뜨려버렸고, 결과적으로는 제국의 붕괴를 불러오고야 말았다. 그리고 이런 이슬람 강요 정책에 반대하는 이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강경하게 탄압하는 폭정을 저질렀다. 이외에도 궁정 내에서 '무타시브(이슬람 율법)' 강요 및 힌두교식 인사법 금지와 제국 각지의 비 이슬람 종교 시설의 파괴, 비 무슬림 관료들에 대한 차별과 이유 없는 해고를 일삼았다. 이에 이슬람 학자들과 신자들은 '이슬람 성군이 탄생했다'며 칭송했지만, 이는 소수의 무슬림들의 의견일 뿐이었고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던 힌두교도들은 이런 아우랑제브를 증오했다. 게다가 아우랑제브의 끝없는 전쟁에 들어가는 군비 때문에 국가 재정은 나날이 악화되었고 도저히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았다.[* 또한 아우랑제브의 즉위 명분이었던 '선제의 폭정으로 인한 재정 파탄'은 아우랑제브 본인의 실책으로 인해 들고 일어난 반 무굴 세력과 제위 초부터 끝없이 이어져 오던 전쟁 및 해이해진 관료 기강으로 인한 부정부패의 만연으로 수 배는 더 심하게 답습하였다. 황제 개인의 생활은 검소했을지 몰라도 전쟁 지출이나 병사들의 봉급으로 막대한 돈을 지출하느라 그 규모만큼은 절대로 선대 황제들에 뒤지지 않았다.] 결국 아우랑제브 사후 제국은 끝없는 반란과 재정 파탄으로 멸망 직전에 몰려있는 상태였다. 이를 아우랑제브의 차남 [[바하두르 샤 1세]]가 어느 정도 수습했으나 즉위 5년만에 급사하여 이후 제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껍데기만 남아 전 인도를 아우르는 대제국으로서의 무굴 제국은 불과 20년도 되지 않아 사실상 멸망하게 된다. 그렇지만 위에서도 잦게 언급되는 군사적 재능 하나만큼은 천재에 가까울 정도로 매우 뛰어났다고 평가된다. 개인의 무력 면으로는 황자 시절 아버지와 함께 머물던 군영에 대형 전투 [[코끼리]] 하나가 난입해오자 혈혈단신으로 말에 올라타 장창으로 코끼리를 죽여 '용사'라는 뜻을 가진 '바하두르(Bahadur)'[* 몽골어 '바아투르(Baghatur)'에서 유래한 단어.] 칭호를 하사 받았으며, 전술•전략가로서의 능력은 물론 군행정가로서의 재능도 뛰어나 화약 무기 도입,[* 후일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선진국의 군사 기술자들을 초청해 지속적으로 개량한 결과 로켓 무기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군 조직 체계화, 병과의 유기적 연계 등의 개혁을 단행하여 아우랑제브 시기 무굴 제국의 군사력은 정점에 달했다고 평해진다. 다만 무굴 제국군이 정점에 달하는 이 시기에도 연간 1백만 루피의 세금을 창출하던 무굴 제국의 대표적인 무역항인 수라트가 마라타 동맹의 지도자인 시바지에게 함락되어 6일 동안 계속된 약탈은 무굴 제국의 세금 수입에 치명타를 입혔다. 대대적인 약탈의 와중에 멀쩡했던 이들은 영국인과 포르투갈인들이었는데 유럽 국가를 건드리면 마라타는 끝장이라고 판단했던 시바지는 이들에게 무리하게 공세를 가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인도의 군사 기술력과 인프라는 유럽 문명과의 활발한 인도양 무역과 교류를 통해 상당한 발전을 이루면서 유럽의 성형 요새와 유사한 구조의 대포병 요새들이 적지 않았다. 당시 유럽의 군대들이 겪었듯이 이런 포격에 강한 낮고 두꺼운 방벽에 사각이 안 생기는 공간 디자인, 대규모 요새포 운용이 가능한 본격적인 요새 하나에 걸리면 무굴 제국의 군대도 몇개월이고 빌빌거리며 피똥싸는 공성전 상황이 연출되는게 일반적이었는데, 아우랑제브는 [[비자푸르]], [[골콘다]] 같은 이런 장기전으로 질질 늘어지는 대규모 공성전에 몇차례나 직접 개입하면서 전황을 타개하고 무굴 제국의 승리를 이끌었다. 군사 기술이란 측면에서도 동시대 유럽, 오스만 제국과 교류하며 지속적으로 기술자, 고문들을 초빙하고, 당시 기술로서 최첨단인 조병창, 탄약 공장을 짓고 여전히 기마 귀족층의 기마 궁시가 중요했던 무굴 제국의 군대에 화약 전담 보병들인 총병대랑 포병대를 집중적으로 육성하고, 배치하는 등 세계적 트렌드를 잘 인지하고 있는 유능한 군사행정가였다. 개인의 무력으로나, 장군으로나, 군주로나 군사적인 능력에서는 인도사 전체에서도 역대급인데 정치, 종교적 문제에서 오히려 스스로 점수 다 까먹어버린 인상이 강하다. 오늘날 [[힌두교]]가 압도적 다수를 이루고 있는 [[인도]]에서 힌두교도들을 탄압했던 아우랑제브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물론 아우랑제브의 실책도 많지만 현재 인도에서는 그 실책을 더욱 강조하여 말하는 부분이 있다는 뜻이다. 대표적인 예로 2016년 인도의 수도 [[뉴델리]]에서 아우랑제브의 이름을 딴 '아우랑제브 로'가 많은 사람들의 비판으로 인해 지워지고 그 자리엔 [[인도 공화국]]의 대통령이었던 [[압둘 칼람]]의 이름이 붙었다. 2014년 인도 공화국의 다수 여당이 되어 현재까지 이어져 온 [[인도 인민당]]은 아예 아우랑제브에 이어 무굴 제국 자체를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인도의 길거리에서 아우랑제브를 악마화해 묘사한 조각상을 불태우기도 한다니 말다했다. 반대로 [[악바르 대제]]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나쁘지 않다. 관용과 타협을 좋아했던 악바르 대제였기에 교과서에서도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대왕]]에 필적하는 위대한 성군으로 묘사하는 반면, 아우랑제브만큼은 무리한 확장으로 제국의 멸망을 자초한 평가를 주로 실어놓는다. 반대로 [[파키스탄]]에서는 아우랑제브만한 황제가 따로 없다. 일단 파키스탄은 [[이슬람교]]가 주류일 뿐만 아니라 힌두교도들을 원수 대하듯이 하고 있기 때문에 힌두교도들을 탄압하고 이슬람을 숭상했던 아우랑제브를 싫어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 인도에 비하면 워낙 아우랑제브에 대한 이미지가 호의적인 편이기 때문에 [[악바르 대제]]보다도 더 위대한 취급을 받는 경우도 왕왕 존재한다. 심지어 파키스탄의 교과서에는 무굴 제국의 최고 전성기를 오히려 아우랑제브로 보는 시각도 있고, 그에 대한 서술 분량도 인도에 비하면 압도적인 비율로 그득그득하다. 곳곳에 아우랑제브의 이름을 딴 도로나 건물들을 짓기도 하고 심지어는 그의 이름을 신형 미사일에 붙이기도 했다. 다만 안타까워하는 점은 아우랑제브의 지나친 확장 정책으로 인해 그의 사후 무굴이 얼마 가지 못하고 멸망했다는 점, 그리고 남인도의 [[마라타 동맹]]을 확실하게 끝장내지 못하고 죽었다는 점 정도다. 요즈음 들어서는 그에 대한 재평가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아우랑제브가 조상인 [[악바르 대제]]처럼 포용력이나 정치적 유연성을 가지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마냥 비관용적인 것은 아니었다. 힌두 귀족의 수는 그의 치세에 오히려 증가하였는데 아우랑제브 이전엔 힌두교도가 귀족의 20%를 차지했지만 그의 재위 시절엔 그 비율이 30%에서 절반 가까이로 늘었다. 무슬림 귀족들은 이런 힌두교도 우대에 아우랑제브에게 따졌으나 그는 "그대들의 종교는 그대들의 것이고, 내 종교는 나의 것"이란 말로 듣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무슬림이었는데다가, 평생을 전장에서 보내온 강직하고 엄격한 무골이기도 했던 아우랑제브는 [[샤리아]]에 기반한 이슬람 민법 강화와 민간에서의 혼합종교적(syncretic) 풍습에 대한 탄압 등으로 기본적으로 전임자들보다 종교적으로 더 엄격한 사회를 지향했던건 사실이나, 힌두교 음악과 제례에 대한 전면적 탄압 같은 에피소드는 과장된 부분이 많다는 게 현대 무굴 제국 사학계의 평가이다. 사실 아우랑제브의 '불관용'이란 측면은 시크교 구루 살해, 바라나시 강제 개명 시도 같이 해당 종교의 지도자급 인물이나 성지에 대한 정치적 박해 중심이지, 아예 사회적 차원에서 이슬람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 신도들을 아예 강제 개종, 박멸하려고 했다는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 악명 높은 힌두교 사원 파괴 사건들도 주로 정치적 반란이나 불온함에 대한 징벌적 성격이 강했고, 반대로 아우랑제브 치세의 후원으로 인해 융성해진 힌두교 사원들도 있다. 게다가 독실한 무슬림을 표방한 것치고 그가 상대한 적들 중 많은 수가 [[데칸 술탄국]]의 같은 무슬림 군주들이었고, '아우랑제브의 악행'으로 기억되는 큰 사건들 중 하나인 [[골콘다]] 약탈과 모스크 파괴도 같은 무슬림 상대로 저지른 것이다. 즉, 아우랑제브가 종교 불문한 정치적 독단성과 무자비함으로 적을 많이 만든 건 사실이라도, 특별히 종교적으로 불관용과 독선의 화신이었다는건 후대 19세기 인도 자체와 영국의 자유주의 역사학계가 만들어낸 과장된 인식이 20세기 들어와 힌두교 다수 인도 vs 무슬림 파키스탄이라는 정치적 구도 속에 재생산되면서 생긴 왜곡에 가깝다.[[https://aeon.co/essays/the-great-aurangzeb-is-everybodys-least-favourite-mughal|#]][* 이런 악평은 19세기 인도에서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예를 들어 19세기 후반의 인도 작가 반킴 찬드라는 자신의 소설 『라즈싱하』에서 아우랑제브 황제가 힌두를 증오하려고 태어난 인물로 묘사하였다. 영국 지배자들 역시 다르지 않았는데 [[인도 제국|자신들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슬람의 통치와 비교하며 힌두를 차별한 아우랑제브는 폭군이었다고 평가했고 이 평가는 후대로 그대로 이어졌다. [[http://santalinus.egloos.com/m/3563887|#]] [[http://sky2k.blog.me/220778165891?Redirect=Log&from=postView|##]]]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