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우랑제브 (문단 편집) == 불우한 가정사 == 아버지 [[샤 자한]]을 폐위시키고 유폐한 후 형제들을 죽인 [[업보]] 탓인지 아우랑제브는 가정사가 좋지 못했다. 아버지랑 형제들은 물론 자녀들과도 관계가 좋지못했고 그의 자녀들은 아우랑제브를 향해 칼 끝을 겨누었다. 특히 두번째 황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무하마드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나빴고 아버지가 소개해준 아내를 버리고 아버지의 적인 숙부의 딸과 결혼하여 장인이 된 숙부한테 가담하였다. 결국 아우랑제브는 포로가 된 무하마드를 감옥에 가두어버렸고 무하마드는 감옥에서 죽었다. 첫번째 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 [[바하두르 샤 1세|무아잠]]은 1670년 첫 반란을 모의했다가 들통난 후 아버지에게 용서를 받았지만 그 뒤에도 세 번이나 반란을 모의했다. 네 번째 반란 때에는 아우랑제브도 참지 못하고 그를 감옥에 가둔 후 더울 때라도 냉수를 제공하지 말고, 좋은 식사도 제공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 7년여 간을 감옥에서 죄수로 복역하던 무아잠은 아버지에게 또다시 용서를 받고 1695년 풀려나 아버지의 감시가 있긴 했지만 가족들과 함께 지냈다. 그 후 그는 제국의 서북 변경지대 [[카불]]의 총독으로 부임했다. 재임 중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얘기를 들은 후 무아잠은 할아버지처럼, 아버지처럼 남은 형제들을 모두 죽인 후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다섯번째 아들인 악바르는 1681년 [[라지푸트]]와 손을 잡고 반란을 기도했으나 사전에 발각난 후 데칸으로 도주해 [[마라타 왕국]]의 왕 샴바지와 손을 잡고 대항했다. 격분한 아우랑제브는 '최악의 악바르'라 부르며 군사를 모아 마라타 왕국의 군대를 박살내 버리고 샴바지 왕을 포로로 잡아 잔인하게 고문한 끝에 죽였으나 악바르를 잡는데는 실패했다. 도주한 악바르는 [[페르시아]]로 망명했고 그곳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기다리던 중 사망했다. 장녀인 [[https://en.wikipedia.org/wiki/Zeb-un-Nissa?wprov=sfla1|제브니사 공주]]와도 관계가 나빠서 자주 다투었으며 나중에는 그녀가 동복동생인 [[https://en.wikipedia.org/wiki/Muhammad_Akbar_%28Mughal_prince%29?wprov=sfla1|악바르]]를 지지했는데 아우랑제브 황제는 제브니사가 반역자인 악바르와 연락했다는 것에 분노했고[* 특히 편지에서 아버지를 이슬람 율법에 위배되는 범죄를 저질렀다며 대놓고 비난하는 내용이 나와서 아우랑제브가 더욱 분노하게 되었다.] 그녀의 재산을 몰수한 다음 델리 외곽의 감옥에 가두었다. 그녀는 아버지한테 용서받지 못하고 20여 년간 세상과 격리된 채 지내면서 마크피(숨겨진 자)란 필명으로 수백 편의 수피 전통시를 쓰는 시인이 되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죽기 5년 전에 감옥에서 사망했고 그녀의 시는 1929년 델리에서 출간되었다. 아우랑제브는 사망하기 전 아들 세 명에게 제국을 삼등분해서 다스리라고 유언을 남겼고, 제국의 황제 자리는 장남 [[무함마드 아잠 샤]]에게 넘겼으나 앞서 말했던 차남 무아잠이 모든 형제들을 죽이고 황위에 올랐다. 그나마 형제간의 [[골육상쟁]]을 생전에 안 본 게 위안거리인 셈. 아내들을 사랑했지만 아내들도 자식들만큼 그의 생애 동안에 불행하게 살았는데 첫째 아내는 5번쨰 아이를 낳다가 산고로 사망하고 두번째 아내와는 권력 문제로 다투게 되어 별거하였고 세번째 아내는 전염병으로 사망했으며, 네번째 아내와도 관계는 좋았지만 그가 사망한지 4개월만에 사망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