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우랑제브 (문단 편집) === 죽음 === [[파일:place-2018-07-3-10-16877c6967f6730f3b3c3de6a3143560.jpg|height=300]] 아우랑제브의 무덤. 아우랑제브가 죽을 무렵, 그의 치세 하의 무굴 제국은 영토 적인 면에서만 보면 그 절정에 달해 무려 4백만 제곱 킬로미터에 달해 현재의 [[인도]]보다도 훨씬 거대했다. 인구는 1억 5,800만 명에 달했고 거의 [[중국]]의 [[청나라]]에 맞먹을 정도로 거대한 규모의 대제국을 이룩했던 것이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그 내부는 심각하게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이미 [[자한기르]]나 [[샤 자한]] 등 선대 황제들의 무분별한 사치 행각으로 국고는 안그래도 텅텅 비어있던 상황이었는데, 아우랑제브가 몇 십년에 걸쳐 전쟁을 치르면서 엄청난 군비가 필요했고 국고는 적자에 적자를 거듭했다. 게다가 지방 관리들의 부정부패도 심각했고 제국 중앙정부의 통치력도 매우 약했다. 황제라는 구심점이 사라지면 언제든지 독립해 떨어져나갈 위험이 곳곳에 그득했다. [[사상누각]]이라는 단어가 그대로 생각나는, 겉으로만 번지르르한 대제국이었다는 뜻이다. 늙은 황제는 27년 간 [[데칸 고원]] 일대에서 [[마라타 동맹]]과 전쟁을 치렀고 그의 나이는 무려 88세에 달했다. 하지만 황제도 30년에 가까운 전쟁에 지쳤던지 마침내 군 막사에 마련된 병석에 누웠고, 기력은 나날이 쇠했다. 아우랑제브는 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이 퍼지면 바로 계승 전쟁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자신이 살아있는 것을 계속 알리고자 했다고 한다. 아우랑제브는 1707년 3월 3일 아흐메드나가르에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 그는 죽기 직전 300루피 정도의 부장품만을 가지고 묻어달라고 요청했고, 자신의 장례식은 최대한 간소하게 치를 것을 명했다. 사치를 배격했던 독실한 무슬림 신자였던 아우랑제브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황제의 장례식은 [[수피|수피교]] 성인의 중정에서 치러졌고 시신은 깨끗한 무덤에 안장되었다. 마지막에 아들들에 보낸 편지에 자신의 막장적인 통치를 후회하는 유언을 남겼다. >'''나와 너희 옆에 있는 자들이 평온한 것처럼. 단 혼자(저 세상에) 떠난다. 짐이 이 세상에서 보낸 날들은 속죄의 날들을 제외하고, 나머지에 후회의 통념밖에 남기지 않았다. 짐은 임기 응변에 통치하는 재가 부족하고, 백성의 행복을 신경 쓰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제국군은 혼란에 빠져있다. 덕분에 강한 희망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과거의 행동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의 행동을 되돌아볼 수 없다.''' 무굴 제국은 아우랑제브가 죽은 후 빠르게 쇠퇴한다. 바로 계승 전쟁이 일어나 황족 간의 전쟁이 벌어졌고 약하거나 무능한 황제들이 연달아 즉위했다. 아우랑제브의 아들 [[바하두르 샤 1세]]가 후임 황제로 즉위했지만 이미 아우랑제브 시대에 시작된 제국의 붕괴를 막기에는 무리였고, 바하두르 샤 1세의 무력한 기질과 겹쳐서 제국은 더 급속히 무너졌다. 바하두르 샤 1세가 즉위하자마자 아우랑제브가 죽을 때까지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마라타 동맹]]이 북상하며 무굴 제국을 본격적으로 침공한다.[* 아우랑제브가 워낙 오래 살아서 바하두르 샤 1세가 황제가 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63세였다. 황제에 오른지 5년 만에 죽었고 이는 무굴 제국의 붕괴를 가속했다.] 아우랑제브 사후 온갖 곳에서 반란이 일어나며 제 영토 하나 제대로 건사할 여력이 부족하던 무굴 제국은 마라타 동맹이 밀고 올라오자 그대로 몰락했고, 아우랑제브 황제가 죽은 지 몇 십년도 지나지 않아 무굴 제국은 [[델리]] 일대만을 다스리는 지방 정권으로 전락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