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오바(중순양함) (문단 편집) === '''와레 아오바''' === 1942년 10월 11일 [[에스페란스 곶 해전]]에서 제6전대는 수송함대의 호위를 맡았으나 미군의 기습을 당하면서도 수송함대 호위임무를 완수했다. 이 당시 아오바는 미군 중순양함들에게 40발 이상의 포탄을 맞아 포탑 2개가 날아가고 함교가 박살나고 탄약고가 유폭 직전까지 가는 등의 큰 피해를 입었지만, 탄약고를 재빠르게 침수시켜 유폭을 막아낸 데다 명중탄 상당수가 불발되는 행운까지 겹친 덕분에 항해능력을 상실하지 않고 탈출할 수 있었다. 수리담당자의 말에 따르면 불발탄이 안 나왔다면 100% 격침되었을 거라고 한다. 미군이 기습할 당시 적을 아군으로 착각해서 '''와레 아오바(나는 아오바다)'''라는 발광신호를 보내다가 미군에게 처맞았고, 얻어터지는 와중에도 '와레 아오바'라는 발광신호를 계속 보냈다는 게 그 유명한 와레 아오바 전설이다. 선제공격에서 큰 부상을 입은 고토 소장[* 양 발이 절단되었으며, 지혈이 제대로 안되는 상황이었다.]이 죽어가는 와중에도 상대를 아군이라 믿고 '와레 아오바(나는 아오바다)'라는 발광신호를 계속 보내도록 명령했으며, 죽을 때까지도 아군의 오인사격을 당한 줄로만 알고 (포격을 가한 미군을 원망하며) '''"바보 같은 놈들"'''이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설이 있다. 전투개시 이후의 아오바와 고토 소장에 대해서도 다소 견해가 갈린다. '와레 아오바'는 통신시설이 날아가 지휘계통이 무너진 상태에서 기함의 건재를 알리기위해 아군에게 보냈던 발광신호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이런 의도였다면 오해받기 딱 좋은 '나는 아오바다'보다 '기함 건재'등의 좀 더 직설적인 신호를 보내는 게 더 타당하다. ] 또한 당시 6전대의 참모였던 키시마 중좌는 고토 소장에게 '연막을 피워서 태세를 정비한 다음 반격하겠다'는 허가를 받아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다만 미군은 이 발광신호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 혼란상황에서 치뤄진 야간전이었고, 일본측은 지휘부가 순식간에 괴멸당해 생존자 증언이 적은데다 전투기록도 제대로 남아있지 않은지라 결국 당시 일본측 상황이 어떠했지는 불명. 사실 '고토 소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적을 아군이라 믿고 있었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일본에서 발간된 태평양전쟁사 관련서적들 중 딱 한 권뿐이다. 미군 측에서는 '''와레 아오바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완벽한 기습에는 성공했지만, 헬레나의 SG레이더를 좀 더 활용했다면 완벽하게 제6전대를 괴멸시킬 수 있었을 거라고 아쉬워하는 게 미군 측 시각이며, 발광신호 이야기도 없다. '''따라서 와레 아오바 이야기는 신빙성이 없다.''' 단지 '와레 아오바'의 임팩트가 워낙 강한데다 한사람의 삽질탓으로 돌려버리면 속이 편한지라(…) 정설처럼 떠돌고 있는 것. 이러한 낭설은 전후 잘 되면 내 탓 말아먹으면 남탓으로 돌리던 연합함대 생존 수뇌부의 주장을 무비판적이게 수용하여 퍼뜨린 현재 극우 일본 밀리터리계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 쉽게 말해 태평양 전쟁 패전의 속죄양이 필요했던 셈. 많은 평범 또는 유능한 일본 해군 제독들이 자신의 잘못만이 아님에도 패전의 한 단면을 제시했다는 이유로 모든 죄를 뒤집어 쓰고 속죄양이 됐다. 이러한 속죄양이 된 일본 제독들은 패전의 죄를 모두 뒤집어 쓰고 일본 극우 밀리터리계에서 일본 제국 멸망의 원흉이자 역적 취급을 받고 있는 현실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