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시리아 (문단 편집) == 정치 == >[[슈쉬|수사]], 훌륭하고 성스러운 도시, (중략) 나는 정복하였다, (중략) 나는 수사의 [[지구라트]]를 부숴버렸다. (중략) 나는 [[엘람]]의 사원을 파멸로 몰아넣었다. 나는 그들의 신들과 여신들을 바람에 날려버렸다. 그들의 조상과 옛 왕의 무덤을 짓밟았고, (무덤에) 햇빛이 들게 하였으며, 그들의 뼈를 꺼내 아슈르의 영토로 옮겨 갔다. >---- >- 아시리아의 왕 '''[[아슈르바니팔]]'''이 [[엘람]] 왕국을 정복한 것을 문자판에 새긴 내용. >[[히즈키야|히스기야]] 왕 14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올라와서 유다의 모든 견고한 성을 쳐서 취하니라''' >---- >- <[[이사야]]> 36:1 아시리아는 다른 민족들에 대한 [[우월의식]]이 강하다 보니 피지배민에 대한 정책이 상당히 강압적이고 잔혹했다.《[[구약성경]]》에도 당시 이러한 정책이 공포와 증오가 담겨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아시리아인 스스로도 자랑스럽게 점토판에 기록하고 있듯이[* 다만 지구라트를 비롯한 [[신전]] 파괴는 고대에 종교가 한 나라의 정체성이기도 했기에 흔히 있는 일이었으며 아시리아만 저지른 일이 아니다.] 저항한 지역은 주민들의 씨를 말려 해골 탑을 쌓고, 항복한 지역의 군주와 귀족들은 짐승처럼 '''코에 구멍을 뚫고 쇠사슬로 엮어 끌고 가 처형'''했으며, 평민들은 먼 곳으로 강제 이주를 시키고, 이 과정에서 거추장스러운 '''아이들은 바위에 머리를 박아 죽였다.''' 또한 아시리아의 유적에서 출토된 사르곤 2세의 부조를 보면 당시 사르곤 2세가 [[포로]]에게 행한 잔혹한 행위가 조각되어 있는데, 포로의 턱에 줄을 연결시켜 사르곤 2세가 그 줄을 당기면 포로가 자연스레 고개를 들게 되고, 그 순간 왕이 들고 있던 창으로 포로의 눈을 꿰뚫어버리는 장면이었다. 그렇게 빈 땅에다 또 다른 곳에서 끌고 온 사람들을 정착시키는 식이었다. 피지배민들에 대한 착취도 가혹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아시리아에 대한 다른 민족들의 증오가 굉장해서 틈만 나면 [[반란]]이 일어났다. 특히 점령한 이집트가 곧바로 반란을 일으켜 독립을 시도하는 등 거대한 영토를 확보했음에도 영토를 안정적으로 유지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아시리아인의 인구가 많지 않다 보니 타국을 점령하고도 제대로 된 통치가 힘든 판국이라 영토 유지가 더욱 버거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아시리아 멸망 후에 분열된 오리엔트 지역을 재통일한 [[아케메네스 왕조|아케메네스 페르시아]]는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 피지배 민족에 대한 관용 정책을 실시해서 광할한 영토를 가진 상황에서도 아시리아보다 오래 갈 수 있었다. 다만 국가 존속 기간 자체로 보면 페르시아도 오래가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이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불과 220년 만에 멸망했는데 이는 신아시리아 제국의 존속 기간인 300년 가량보다도 짧다. 물론 아시리아와 달리 페르시아는 국가 초창기부터 광활한 영토를 확보하고 있었다는 차이는 있지만 무리한 원정(특히 그리스 원정, [[살라미스 해전]]이나 [[마라톤 전투]])을 지속하다가 경기 침체를 맞고 몰락하게 되면서 전성기를 그리 오래 누리지는 못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신아시리아만큼 피지배민들의 반감을 사지 않은 것도 사실이기는 하다.[* 그리고 페르시아는 페르시아 전쟁 이후 팽창이 멎었을 뿐이지 나라 자체가 크게 쇠하진 않았다. 지중해에서의 패권은 잃었을지라도 광대한 영토는 그대로 남았고 오히려 이후 그리스 세계의 분열을 교묘히 활용해 이오니아를 되찾는 성과도 가졌다. 심지어 마지막 왕중왕인 다리우스 3세도 오랫동안 국정을 농단하던 환관 바고야스를 바로 제거해버렸을 정도로 마냥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단지 상대가 알렉산더 대왕이라는 초희귀 먼치킨과 이 때에 다리우스 3세가 그 때의 다리우스 3세가 아니었기에 박살났을 뿐. 그마저도 아케메네스 왕조의 기반은 헬레니즘 제국으로, 다시 셀레우코스 왕조로 이어진다. 아시리아는 멸망 후 그들의 기반을 이어받은 국가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그리고 [[바빌론]] 만큼은 아시리아 제국도 함부로 건드리지 않았다. 바빌론이 부의 원천인데다가 바빌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정치, 행정, 문화적 관습 등이 많아 위상이 높았기 때문. 아시리아 제국도 바빌론에 대한 절대적 통치를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왕실의 친인척들을 바빌론 왕으로 내세워 대리통치를 시켰다. 바빌론의 체계적인 도시계획은 아시리아인들에게도 인상깊었는지 모티브를 따와 [[님루드]]를 건설했다. 센나케립의 재위 기에 바빌론이 반란을 일으키자 바빌론을 철저히 파괴하고 약탈한 적은 있었지만 이는 당시 아시리아 기준으로도 큰 모독이었기 때문에 뒤 이어 즉위한 에사르하돈은 바빌론을 재건하여 민심을 달래기 위해 노력했다. 결국 이 바빌론이 여러 반란으로 인해 아시리아가 쇠약해진 틈을 타 신바빌로니아를 건국하고 아시리아를 멸망시키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