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시리아 (문단 편집) == 기타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시리아 오리엔트.jpg|width=100%]]}}} ||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아시리아 부조(왼쪽)와 [[라마수]] 석상(오른쪽). 부조의 인물은 영웅 [[길가메시]]로 추정된다. * 군사 강국이란 이미지와 잔혹한 지배 정책 때문에 '아시리아인=피에 굶주린 [[전투종족]]'이라는 선입견을 가질 수도 있지만 생활상이나 문화 자체는 다른 오리엔트 지역의 주민들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 문화적으로는 앞서 잔인한 발언과 부조로 유명한 아슈르바니팔이 최초의 체계적인 [[도서관]]을 만들어서 그 유명한《[[길가메시 서사시]]》전문은 [[수메르]]보다도 아시리아의 도서관 유적에서 먼저 발견되었고, 아시리아의 유적 중 하나인 카네쉬 유적에서 발굴된 편지들을 보면 거래의 독촉에 대한 불만감, 남편에 대한 바가지, 혼인을 해야 하니 빨리 집으로 돌아오라는 것 등 평범하고 현실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지극히 [[상인]]스러운 성향을 정복 시기에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시민들이 주고 받는 편지에 폭력적인 이야기가 나올 리가 만무하긴 하다. * 아시리아는 여러 번 [[수도(행정구역)|수도]]를 옮겼기 때문에 [[24번 신에 나오는 노인|“아시리아의 수도는 어디인가?”]]라는 질문에는 쉽게 답하기 어렵다. 건국 당시의 첫 번째 수도는 나라 이름과 같은 [[아수르]]였으나, 기원전 18세기에 슈바트-엔릴로 수도를 한 차례 옮겼다가 다시 아수르로 돌아왔다. 그러다가 기원전 13세기에 황제의 이름을 딴 도시 카르-투쿨티-니누르타로 [[천도]]한 뒤 다시 아수르, 칼후([[님루드]]), 두르-샤루킨(코르사바드)를 거쳐 신아시리아 제국 시기인 [[센나케립]] 때 [[니네베]]로 수도를 옮겨 멸망할 때까지 니네베가 수도였다. 멸망 이후 신아시리아 제국의 잔여 세력이 [[하란]]을 수도로 삼고 메디아-신바빌로니아 연합군에게 저항하기도 했다. * 그리스의 [[스파르타]]처럼 국민 구성원 거의 대부분이 [[군인]]이었다. 그러다보니 [[상무정신]]이 강해서 국왕조차 전쟁이 없을 때는 직접 전차에 탄 상태에서 [[활]]로 [[사자]]를 잡는 [[사냥]]에 나서는 것이 관례였다. * [[님루드]]에서 발견된 부조에 [[달렉]]을 닮은 [[http://boingboing.net/2013/03/30/assyrian-dalek-ca-865-bce.html|공성 병기]]가 등장하여 컬트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의 국가 중에서도 아시리아의 유적이 가장 먼저 발굴된데다가《[[구약성경]]》이 기록된 시대상이 겹쳐서 교차검증하기에도 용이하기 때문에 활발하게 연구되었고, 아시리아에서 쓰이던 [[아카드어]]와 [[쐐기 문자]]도 수메르의 것보다 먼저 발견했기 때문에 수메르, 바빌로니아 등을 비롯한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의 고고학, 역사, 언어, 문화 등을 연구하는 학문을 메소포타미아학이나 이라크학이 아닌 '''아시리아학'''(Assyriology)이라고 부른다. 아시리아의 존속 기간이 매우 길었을 뿐 아니라 국가에서 도서관을 건설하는 등 자료 보관에 힘을 쓴 덕분에 자료가 많이 발굴될 수 있었다. * 소설《[[듄의 신황제]]》에서 레토가 고대 지구에 대해 설명할 때, 아슈르나시르팔 2세에 대한 언급이 잠시 등장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