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슈케나짐 (문단 편집) === 동부 유대인과 서부 유대인 === 18세기 말 [[폴란드 분할]]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멸망하고 폴란드 분할이 이루어지면서 많은 유대인들이 [[프로이센]] 혹은 [[합스부르크 제국]]이나 [[러시아 제국]]의 신민이 되었다. [[프로이센 왕국]]의 유대인들은 18세기 말 이후 상당히 많은 자유와 권리를 얻게 되었다. 농노제가 철폐되고 세속적인 부르주아 사회가 자리잡으면서 [[종교적 소수자]]들에 대한 사회의 차별이 감소하였던 것이다. 농노제의 철폐가 좀 더 늦었던 오스트리아 제국에서는 그만큼 유대인들의 처우 개선이 늦었다. 1816년 유대인은 프로이센 전체 인구의 1.1%에 불과했으며 1871년에도 1.2% 정도에 불과했다. 프로이센 정부는 유대인들에게 수공업을 권장했으나 유대인들은 이전부터 종사하던 무역업이나 금융업에 종사하던 편이었으며 특히 금융 계통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유대인 고리대금업자에 대한 신화는 어떻게 보면 프로이센 왕국 시절에 생겨났다고도 볼 수 있다.[* 비교하자면 중세 이베리아 반도의 [[세파르딤]]들도 금융업을 하였으나 이들의 금융업 규모는 비교하자면 [[제3금융권]](…) 수준으로 이탈리아 피렌체나 카탈루냐 바르셀로나 등의 금융업에 비교도 되지 않는 영세한 수준이었다.] 과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 행상을 하던 유대인들은 프로이센 왕국에서 대거 은행업이나 주식 시장으로 진출하였는데 1882년 기준 프로이센의 금융업, 주식매매 등에 종사자 중 1/5 가량이 유대인이었다. 1880년대 기준 프로이센 대학생의 1/10이 유대인이기도 했다.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아슈케나즈 유대인들은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었으며, 자신이 유대인임을 나타내는 특수한 복장의[* 일반적으로 뾰족한 모자를 착용하였다. [[다윗의 별]]이 사용되기도 했지만 이 표식을 가장 애용한 것은 훗날의 [[나치 독일]].] 착용 및 특수한 세금을 부과받는 것과 같은 차별 대우에 노출되어 있었지만, [[계몽주의]]의 확대와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유대인들 중 상당수는 주류 사회에 동화된다. 이전까지는 아랍인들처럼 부계명을[* 단순히 부계 성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을 변형한 성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아버지의 이름 앞에 ~의 아들이라는 뜻의 벤~을 붙여 성처럼 사용했고, 아랍인들은 같은 의미로 남자는 빈~, 여자는 알~을 붙이며, 벤과 빈은 어원적으로 같은 말이나 히브리어의 'e' 모음이 아랍어에서는 'i'로 변형되었고, 이외에 어원이 같은 다른 단어도 히브리어의 'e'가 'e' 모음이 없는 아랍어에서는 'i'가 되는 경우가 많다. 유럽에서도 러시아에서 (이 경우에는 성씨로 쓰는게 아니라 미들네임으로 쓰는 거지만) 아버지의 이름에 -ович를 붙이거나, 아일랜드계 성씨에서 자주 보이는 O'가 대표적.] 사용하던 유대인들이 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성씨]]를 쓰기 시작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 폴란드 분할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프로이센 영토의 유대인들은 상당수가 도시 부르주아지로 성장해나갔으나, 러시아 제국령 우크라이나 일대의 유대인들은 러시아 제국의 산업 발전이 지체된 만큼 부르주아지로 성장하는 속도도 늦었다. 물론 폴리투 내 유대인 소작농들의 경우 새로 황무지를 개간하고 정착한다는 조건 하에서 현지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 농노들보다 훨씬 지대 부담이 적은 편이었으나, [[포그롬]]이 활발해진 이후 사정이 변하였다. 근대 동유럽의 시골에 살던 지주들은 도시에 있는 유대인 부르주아들이 자신들의 권위를 위협한다고 의심했으며, [[라트비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의 농노들은 유대인들이 독일인, 폴란드인의 앞잡이라고 여기며 증오했다고 한다. 산업혁명 시대가 되자 농촌 인구가 도시에 '''빈민'''으로 유입되면서 반유대주의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유대인에 대해 악감정을 가지고 있던 농촌 인구가 도시에 빈민으로 유입이 되었다.] 19세기 초반에는 동유럽 유대인 상당수가 [[보드카]] 양조산업에 종사하였기 때문에[[https://www.timesofisrael.com/the-forgotten-history-of-jews-in-the-alcohol-industry/|#]] 유대인들은 지역 사회 알코올 중독과 관련한 폐단의 원인으로 몰리곤 했다. 19세기 말 키시너우 포그롬을 계기로 러시아 제국 출신 유대인 상당수가 러시아 제국을 떠나 해외로 이민하게 되었다. 하지만 러시아 출신 유대인들은 유럽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고 싶어도 현지 토박이 유대인들의 차별로 고초를 겪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키시너우 포그롬 이후 영국으로 이민한 유대인들의 사례를 들 수 있다. 러시아 제국 출신 유대인 이민자들은 기존에 이미 영국 사회 내 자리잡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가난뱅이라고 멸시와 차별을 받았다. 당시 영국 정부는 러시아에서 이주해온 유대인들을 골칫덩어리로 여기고 [[영국령 우간다 계획]] 등을 세우기도 했는데, 여기에는 비러시아 출신 유대인들의 입김이 다소 반영되었다. 프로이센이나 프랑스 등에서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현대의 아슈케나짐 유대인 사회 내에서도 러시아 제국/소련 출신 이른바 동부 유대인과 서유럽의 아슈케나짐 유대인 사이의 갈등은 적지는 않은 편이다. 1970년대 소련의 유대인 이민 허용이나 소련 붕괴 이후 새로 미국이나 이스라엘로 이민한 아슈케나짐 유대인들의 경우 아슈케나짐 유대인은 다 부자일 거라는 편견과 다르게 상당수가 빈곤층이다. 이러한 연유에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 러시아 제국 출신 유대인들은 비교적 동유럽 출신 유대인에 대한 차별이 덜했던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데, 이들은 오늘날 [[미국 유대인]]들의 직계 기원에 해당한다. 자세한 내용은 미국 유대인 문서 및 [[우크라이나계 미국인]], [[벨라루스계 미국인]] 문서 참조. 한편 이렇게 이주한 유대인들은 빈민들이 많았기 때문에 범죄에 금새 유혹되어 [[유대인 마피아]]나 [[폴란드 마피아]] 중에 아슈케나짐 유대인 출신들이 많다. 벨라루스나 우크라이나 출신 유대인들은 해당 지역의 벨라루스인과 우크라이나인 민족주의자들과 서로 반목이 심했던 편이었고, 당시 미국으로 이주한 동유럽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동유럽에서 찾는 것을 거부했다.[* 여기에는 당시 미국 사회 내 폴란드계 미국인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도 이유였을 수도 있다. 이 외에도 "우크라이나어는 러시아어의 방언일 뿐이다."라고 말한 레프 트로츠키나 우크라이나 대기근을 주동한 라자리 카가노비치가 우크라이나계 유대인이었던 것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동유럽 각지의 민족주의와 동유럽 유대인들은 서로 상성이 굉장히 안 좋은 편이었다.] 서유럽은 상황이 비교적 나았던 편이었지만 유럽 내 자유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프랑스에서마저 20세기 초반 사회 전체를 뒤흔든 [[드레퓌스 사건]]이 터지면서 아슈케나짐 사이에서는 [[시오니즘]]이라는 사상이 크게 유행하게 된다. 1930년 초반 당시 아슈케나즈 유대인의 수는 대략 1500만 명 정도로 추정되었으며, 이 중 900만여 명 가량은 유럽에 거주하고 있었다. [[폴란드 제2공화국]][* 오늘날 우크라이나 서부와 벨라루스 서부를 포함]에는 330만여 명, 소련에는 300만여 명, 헝가리와 루마니아에는 120만여 명, 독일에 52만여 명, 오스트리아에는 18만여 명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하지만 나치에 의해 자행된 홀로코스트는 이 900만 유대인 가운데 약 6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그 중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유대인들이 밀집해있던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우크라이나 일대에서의 피해가 심각했다.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에서는 전체 유대인 중의 90~91%가 쓸려나갔다. 홀로코스트 이후 아슈케나즈 유대인들의 중심지는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동됐고, 현재는 아슈케나즈 유대인의 숫자는 약 1천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 가운데 미국에 거주하는 아슈케나짐이 대략 500만 정도이며, 이스라엘 본토에 거주하는 아슈케나즈계 혈통이 300만 정도, 나머지 국가에 거주하는 아슈케나짐들을 도합한 게 200만 정도로 계산된다. 또한 홀로코스트로 인하여 아슈케나즈 유대인들의 문화는 말 그대로 뿌리뽑히게 되는데, 특히나 약 500만 명의 화자를 가지고 있던 [[이디시어]]는 사실상 [[사어]]가 된다. 다행히도 문헌이나 음성 자료들이 상당히 많이 남아있어서 보존은 가능하다고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