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슈케나짐 (문단 편집) === 폴란드 유대인의 황금 시대 === 십자군 전쟁 당시 십자군들은 예루살렘으로 출정하러 가기 전에 가까운 장소의 유대인들부터 학살하고 출발하던 일이 잦았다. 이런 대학살을 피하여 서유럽에 거주하던 유대인 중 상당수가 [[폴란드]]로 이주하였다. 1332년 폴란드 왕국의 [[카지미에시 3세]]는 당시 폴란드 왕국의 빈약했던 상공업을 부흥시킬 목적으로 유대인 이민자들에게 혜택을 주고 유대인들이 안정적으로 생업에 종사할 수 있는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하였다. 이민 과정에서 반유대주의 폭동이 일어나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 폴란드 왕국은 아무렇지도 않게 유대인 박해와 학살이 종종 일어나던 다른 지역에 비하면 비교적 안전한 지역이기도 했다. 이베리아 반도의 유대인들이 [[라디노어]]를 사용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아슈케나짐들은 독일어를 기반으로 하되 히브리어 어휘가 상당수 추가된 '''[[이디시어]]'''를 사용하였는데, 새로 이주한 폴란드 왕국에서도 상업이나 무역에서 독일어가 흔하게 사용되던 이유로, 동유럽 각지의 유대인들은 모어로 이디시어를 유지하게 되었다. 특히 [[야기에우워 왕조]] 시대와 대략적으로 겹치는 1332년부터 1572년 사이의 기간은 [[폴란드 유대인]]들의 황금 시대로 불렸다. 14세기 폴란드 왕국이 동유럽에 거대한 영토를 지녔던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동군 연합을 이루고 리투아니아 귀족들이 폴란드인과 동화되어 이해관계가 일치하면서 유대인들은 동유럽 각지로 안정적으로 정착하기 시작했다. 특히 [[지그문트 1세]]부터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에 이르는 시기동안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유대인의 천국으로 불렸다.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이들을 적극 유치하고 보호했던 까닭은 중세에서 근세까지 동유럽 각국의 발전을 심각하게 가로막던 문제인 인구 부족 때문이었다. 또한 당시 [[가톨릭]]이 국교였던 폴란드는 1569년 루블린 조약을 계기로 [[정교회|정교도]]가 다수인 우크라이나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했는데[* 처음에는 엄연히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영토였던 우크라이나 일대는 [[루블린 조약]] 이후에는 대부분 폴란드 왕국의 직할령으로 넘어가며,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리투아니아인]] 지주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폴란드어]]를 사용하게 되면서 아예 [[폴란드인]]으로 완전히 동화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때 폴란드인 이주자를 따라 유대인 이주자들도 우크라이나 각지에 [[마름]] 혹은 도시의 소상인들로 정착했다. 스페인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조차 계속해서 의심하고 재산을 몰수한다든지 종교재판에 회부시키자, 적지 않은 세파르딤들이 폴란드로 이주하였다. 결과적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일대는 전 세계에서 가장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일대가 된다. 덧붙여서 아슈케나짐과 세파르딤의 혈통이 나누어지던 11세기 당시만 하더라도 세파르딤의 숫자가 아슈케나짐의 9배로 압도적이었으나,[* 다른 통계 추정에 따르면 아슈케나짐 인구는 11세기 기준 전체 유대인 인구의 3% 정도에 불과했다.[[https://books.google.co.kr/books?id=lqaI9mpIjMkC&pg=PA197&redir_esc=y#v=onepage&q&f=false|#]]] 세파르드 유대인들의 본고장이었던 이베리아 반도를 재정복한 스페인 왕국이 워낙 가혹한 유대인 탄압 정책을 펼친 결과 지속적으로 세파르드 유대인들이 서유럽 및 동유럽으로 이주해나갔고, 16세기 유대인들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세계 유대인 인구의 4분의 3 정도가 폴란드-리투아니아에 거주했다고 한다. 20세기 초반이 되면 11세기와는 정 반대로 아슈케나지 유대인들의 수가 세파르딤보다 9배 가량 많게 된다. 고대 유대교 학문의 중심지가 [[바빌로니아]]의 수라와 품베디타였다면 근세 유대교 학문의 중심지는 폴란드의 [[크라쿠프]]와 리투아니아의 [[빌뉴스]]가 떠올랐다. 야기에우워 왕조 시절 전성기를 누렸던 폴란드를 중심으로 한 아슈케나짐은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루블린 합동을 계기로 한 나라로 통합하면서 여러차례 격변을 맞이했다. 상술한대로 유대인들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농촌에서 마름 혹은 도시의 소상인들로 정착하면서 루테니아인들의 분노는 폴란드인 뿐만 아니라 유대인에게도 향했다. [[흐멜니츠키 봉기]]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코사크들에게 학살당했으며, 대홍수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영토의 절반을 일시적으로 점령한 러시아는 연방보다 유대인에게 더 적대적이었다. 근세 폴란드와 헝가리 및 동유럽 지역의 상업은 유대인과 [[독일인]]들이 양분했었으나, 이후 독일인 상인들이 동유럽 각지에서 유대인들을 누르고 주도권을 더 가져가기 시작했다. 오늘날 아슈케나짐 유대인 중 금발벽안 아니면 이목구비가 동유럽계와 흡사한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아슈케나짐을 [[하자르 칸국]]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으나, [[폴란드-리투아니아]] 시절에는 유대인의 권리가 농노보다 높았기 때문에,(심지어 유대인 농민의 경우에도 빈 땅을 개간해주는 대가로 정교회를 믿는 농노들에 비해 세금을 훨씬 더 적게 내는 편이었다.) 부유한 유대인 상인이 현지 농노 여성 사이에서 사생아를 두거나 아니면 [[코사크]]들이 유대인 촌락을 약탈하는 와중에 생긴 아이들을 유대교 사회에서 그냥 유대인으로 받아들이는 경우 등등이 많아서 혼혈이 많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정작 하자르 칸국의 구성원 대다수는 하자르 칸국 멸망 이후 유럽으로 이주한 경우보다는 [[셀주크 튀르크]](!)나 아스트라한의 [[볼가 타타르]] 등으로 흡수된 경우가 많았다.[* 사족으로 하자르 칸국의 후예임을 주장하는 유대인 민족으로 [[카라임 유대인]]이 있는데, 이들도 중세 초 멸망한 하자르 칸국의 직계 후손보다는 중세 말 십자군 전쟁 시대 이후 [[레반트]] 지역에서 [[크림 반도]]로 이주한 유대인들의 후손으로 추정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