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리스토텔레스 (문단 편집) == 중세의 재수용 == >오히려 중세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라틴어로 번역한 번역 대본들은 상당 부분 아랍어 번역본들이었다. "우리가 자부심을 가지고 서구 문화의 업적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물론 어느 정도 근거가 있지만, 이때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동방이 우리 서구 문화의 업적에 크게 기여를 했다는 사실이다.······중세 유럽은 그리스 철학을 그리스로부터 직접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시리아·페르시아·아랍의 학자들과 자연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의 매개를 통해 간접적으로 받아들였다"고 질송은 말한다. 그럼 왜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들이, 이미 9세기에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포기타의 작품들이 아일랜드와 프랑켄 지역의{{{-2 fränkisch}}} 수도자들에 의해 변역된 것처럼, 직접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될 수 없었는지 의문이 생길지 모른다. 이에 대해 바로 디오니시우스 번역이 아리스토텔레스 번역을 방해했다고 말한다면, 그런 답도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기원후 첫 천 년 동안 그리스도교의 자기 이해와 세계 이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 방식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게 플라톤 정신에 가까웠으며,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대표되는 것이었다. 바로 그런 현상이 12세기 중반 무렵에는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솔즈베리의 요한 같은 인물은 구체적으로 만나는 세상의 실재 현실에 자신을 개방하려 하는 전적으로 새로운 마음 자세가 서구 사유 속에 얼마나 깊이 무르익어 있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는데, 그런 마음 자세는 바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다른 것과 구별하게 하는 기본 특징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직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헌들이 아랍어라는 우회로를 거쳐 번역되었다고 하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지 못하며, 특히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떤 방식으로 아랍 사람들에게 도달하게 되었는지 말해 주지 못한다. 실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정치적 이주{{{-2 移住}}}라는 데 있다. 그것은 이오니아 철학이 소아시아 연안에서 시칠리아와 남부 이탈리아, 그리고 결국 아테네로 가게 된 것이나, 오늘날 기호논리학이 미국 대학들에 정착하게 된 것과 똑같은 방식이었다.''' >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그리스도교 사상 사이에는 처음부터 이질성{{{-2 異質性}}}이 있었고, 그런 이질성은 많은 종류의 뿌리에서 양분을 취하고 있었다. 바로 이 이질성은 5세기 네스토리아니즘{{{-2 Nestorianismus}}}이 명시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연합하게 되자 명백한 형태로 나타난다. 네스토리우스는 페르시아 태생으로, 그의 이론은 안티오키아{{{-2 Antiochien}}} 신학 학파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사건을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역사적 구체성과 가시성{{{-2 可視性}}},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인성{{{-2 人性}}}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해석한다. 이런 사실은, 쉽게 알 수 있듯이,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가 세계를 보는 눈과 어떤 의미에서 유사한 면을 가지고 있다. 네스토리아니즘의 중심이면서 독특하게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중심은 400년을 전후한 시기에 널리 알려져 있던 시리아의 에데사Edessa 학파였다. 그런데 이제 네스토리우스의 그리스도론이 에페소{{{-2 Ephesus}}} 공의회(431년)에서 이단으로 단죄되자, 이 그리스도론은 로마 제국의 영역 안에서는 더 이상 공적으로 주장될 수 없게 된다. 당사자들인 많은 수의 "이단자들"과, 이들과 동일시되지 않는 한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도, 에데사를 떠나 인접해 있는 페르시아로 이주한다. 이들 대부분은 국경 너머에 직접 이접해 있는 니시비스{{{-2 Nisibis}}}에 머문 것으로 보이는데, 이 도시에도 곧 이어 약 천 명가량이 다닌 유명한 학교가 생긴다.(이 학교가 바로 100년 후 카시오도르가 그 모범을 따라 로마에 대학을 설립하고자 했던 그 학교이다.) 말하자면 시리아에 있는 이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교의 학교와 수도원들이 당시에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 문헌들, 특별히 이 유산에 담긴 아리스토텔레스적 실타래를 잘 보관하고 전수해 준 보호 구역{{{-2 保護區域}}} 역할을 담당해 주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 자신뿐 아니라 유클리드{{{-2 Euklid}}}, 히포크라테스{{{-2 Hippokrates}}}, 갈레노스{{{-2 Galenos}}}, 아르키메데스{{{-2 Archimedes}}}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학자들의 철학적·수학적·의학적 문헌들은 처음에는 그리스어에서 시리아어로 번역되었다가, 어쩌면 페르시아어라는 중간 단계를 하나 더 거쳐, 아랍어로 확실히 번역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슬람 세력이 중동 지역 전체와 페르시아의 사산 왕국{{{-2 Sassanid}}}까지 침범해 들어가고, 대부분 시리아인과 페르시아인이던 아리스토텔레스 전문가들이 바그다드{{{-2 Bagdad}}}에 있는 칼리프Kalif의 궁정으로 초빙되었을 때의 일이다. 800년경에는 아랍어가 세계적인 학문 언어나 다름없었다. 아랍어로 한번 번역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책들은 이슬람이 지배하는 모든 곳, 다시 말해 동쪽으로는 인더스{{{-2 Indus}}} 강, 서쪽으로는 피레네{{{-2 Pyrenäen}}} 산맥 지역까지 퍼져 나갔다. > >이런 문화 공간 안에서 이제 훌륭한 아리스토텔레스 주해서들도 생겨나는데, 그 저자들의 이름은 13세기 신학적 대전들 안에서 거의 매 쪽마다 등장하고 있다. 우선 우리는 [[이븐 시나|아비첸나]]{{{-2 Avicenna}}}를 들 수 있다. 그는 980년 페르시아에서 태어났으며, 궁정 주치의이면서 동시에 철학자, 신학자였다.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그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올바른 통로를 발견하지 못한 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마흔 번이나 읽었다고 한다. 이윽고 그는 그 텍스트를 외우게 되었고, 그러고 나서 마침내 전체의 의미가 자신에게 분명하게 되었다고 한다.(그것을 축하하기 위해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많은 선물을 나누어 주게 했다고 한다.) 아비첸나에 이어 우리는 [[이븐 루시드|아베로에스]]{{{-2 Averroes}}}를 들 수 있다. 그는 1126년 코르도바{{{-2 Cordoba}}}에서 태어난 법학자요, 의사요, 철학자였다. 13세기에 서구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주해자라고 하면 "바로 이 아베로에스"를 지칭했다. 라틴 서구에서 그의 영향은 대단한 것이어서, 사람들은 유럽 르네상스 철학을 "아베로에스주의"라고 부를 정도였는데, 이는 어느 정도 정당한 것이었으며, 그렇게 볼 때 그가 미친 영향이 어떤 방향의 것이었는지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이들 아랍 사상가들은 진기하게도 이슬람교보다 서구의 철학과 신학에 훨씬 더 강한 영향을 미쳤다. 이슬람교는 "아리스토텔레스 수용" 같은 것을 전혀 모르며, 오히려 "성전 지상주의적"{{{-2 聖典至上主義的}}}이기 때문에, 코란{{{-2 Koran}}}에만 한정된 신학의 역사는 대체로 철학에 대한 자기 방어의 역사였다. >---- >- 요셉 피퍼{{{-2 Josef Pieper}}}, 김진태 옮김, 『중세 스콜라 철학 ―신앙과 이성 사이의 조화와 갈등―』, 서울,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3, 150-154쪽 흔히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천 년 동안 인정받아 온듯이 설명되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반대다. 성 [[보에티우스]]의[* 최초의 스콜라 학자이자 가톨릭 성인. 동고트왕국의 로마계 관료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라틴어로 번역하려고 했으나, 처형 당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표적 저작으로 《철학의 위안》이 있다.] 죽음 이후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라틴-게르만권에서 오랫동안 잊혀졌고, 심지어 그리스권에서도 매우 미묘한 대우를 받았다. 때문에 (언어적 접근성에 따른 상대적 차이는 있지만)[* 11-12세기의 동로마 공주 [[안나 콤네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대표적인 저작인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주석을 다는 작업을 후원하기도 했다.] 동서를 막론하고 유럽권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저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상황은 12세기 중반 무렵까지 계속되었다. 심지어 이 시기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서유럽에 전해진 과정만 보더라도, 그동안 얼마나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스권에서 미묘한 대우를 받았는지를 보여준다. 아리스토텔르스의 저작은 그리스어에서 직접 번역되지 않았으며, 그리스어에서 우선 시리아어와 (어쩌면) 페르시아어를 거쳐 아랍어로 번역된 것을 카스티야어를 거쳐 라틴어로 번역하는, 지금으로서는 상상조차 어려울 다중 번역이 행해졌다. 이는 "정치적 이주"였다. 그나마 상대적으로 이슬람권에서는 많은 연구가 이어져 왔지만, 후대인들처럼 열광한 것은 결코 아니었으며, 아베로에스 등은 "이슬람교보다 서구의 철학과 신학에 훨씬 더 강한 영향을 미쳤다." 아무튼 재수용때의 충격이 너무 강했는지,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은 유럽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누리게 된다. 심지어 기독교 신학에서도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움직임이 나올 정도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엄연히 이교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신학까지 변화시킬 정도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당시 유럽의 정신세계를 얼마나 뒤흔들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다만 유럽인들이 이교도의 철학을 막연하게 거부한 것은 아니다. 애초에 플라톤부터가 이교도였다. 단 플라톤의 독주가 근 천 년에 걸쳐 이루어졌던 교부 신학 체계에서 플라톤과 궤를 달리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지위를 대체해 철학자의 대명사가 되고, [[스콜라 철학]]의 완성에 기여할 정도로 널리 인용되었음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덕분에 물리 천문에서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코페르니쿠스]], 화학에서는 [[라부아지에]]한테 교정될 때까지 그의 권위는 흔들리지 않는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 등은 아리스토텔레스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런 고전적인 학문의 대명사가 되어 버린 탓이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은 하늘의 물리법칙은 지상의 물리법칙과 다르다는 입장을 취한다. 행성은 완전한 원형 궤도를 가져야 하고 하늘에 있는 모든 것은 매끄러운 평면이어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이는 갈릴레이가 토성의 고리와 달의 언덕들을 발견하면서 아리송해졌다. 완전한 하늘의 물체가 매끄러운 구형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갈릴레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바탕을 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 '체계'에 균열을 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당대 유럽에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던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당시 그리스도교 신학의 시녀였던 플라톤주의를 반박하는 것처럼 보였던 철학이기도 하고, 신의 정체성과 영혼의 존재 가치에 대한 측면에서 그리스도교 사상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그의 학문적 방법론은 모든 사물을 범주화하고 어떤 사물이 그 사물이게 하는 본질을 제시하는 데 있다. 그 본질을 통해 사물의 운동과 변화를 설명한다. 모든 사물의 운동과 변화를 역학적인 방식이 아니라 사물이 자신의 본질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간 안의 사물의 위치변화 또한 에너지나 힘과 같은 역학적인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물이 그 자신의 본성에 따른 정해진 위치로 돌아가는 자연적 경향에서 찾는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미신적이고 우매해 보이는 물리적 설명이 가끔 나오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렇다고 해도 무식한 고대인이라고 비웃어서는 안 되는 게, 사실 이 사람이야말로 [[과학적 방법]]론의 기초를 닦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인식능력에 대해 최초의 단계적 분석을 시도했고 논리학만 기초를 놓은 게 아니라 그 분석을 기초로 경험을 통한 일반화라는 과학뿐 아니라 학문의 방법론 자체를 처음으로 정립한 사람이다. 고대인의 관점에서 '합리적' 설명을 시도하다보니 여러 가지로 무리한 해석이 많이 나오기는 했지만, 아무리 훌륭한 학자라도 시대적 한계까지는 어쩔 수 없을 것이다.([[현대인 천재론]]이 얼마나 무리수인지 생각해 보자) 애당초 이 시대는 자연과학 자체가 분리된 학문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철학과 한 묶음이었던 시대다. 근대에 와서 흔히 까이는 역할을 맡게 된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근대과학이 바로 그의 방법론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단순히 앞선 시대의 방법론이라는 '자료'로만 남았으면 좋았겠지만 불행히도 아리스토텔레스는 필요 이상의 권위를 가지게 되었고 근대과학의 방법론은 그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에 맞서 싸우며 아리스토텔레스를 부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게 되었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과학사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학문이 유럽 지식인들에게 준 충격이 바로 근대과학이 시작된 계기가 된 것으로 보고 있다. [[4원소설]] + 천상의 [[제5원소]] 떡밥 덕택에 [[연금술]]의 기반이 되었다. 연금술이 근대 화학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평가받는 것을 생각하면 의도치 않게 나비효과를 일으킨 셈이다. 물리, 천문, 화학에서 전방위로 까이는 바람에 마치 과학의 원수인 양 여겨지지만 동물 분류학에서는 뛰어났다. 섬게의 크기가 달의 차고 기욺에 따라 크고 작아진다고 쓰기도 했고, 그 시절에 이미 [[고래]]를 [[포유류]]에 가까운 종류로 따로 분류했다(포유류 자체에 포함시킨 것은 아님). 정작 이 부분은 제자들에게 '''"쯧쯧, 우리 선생님 실수하신 듯. 고래는 어류"'''하는 바람에 묻혔다.--제자란 놈들이 스승님 실수할 때는 못 알아채면서 맞는 말 할때는 틀렸다고 착각하냐-- [[윤리학]] 부분에서는 자격, 목적, 좋은 삶, 중용 등이 주요 개념이다. 자격은 어떠한 사람이 어떠한 대접이 적절한지는 그 행위나 대상의 목적에 따라 다르다고 한다. 그리고 개인은 좋은 삶을 지향하며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종의 [[웰빙]]인 셈. 중용은 [[공자|적절하신 그분]]을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적절한 행동을 강조한다.[* 만약 학부 수준에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고 레포트나 논문을 쓰게 될 경우 세부적 질의에서 적절한 답변을 위해 '''적절한'''으로 답변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경우를 수도 없이 만나게 된다. 간단히 말하면 행복을 이루기 위해서는 '''적절한''' 배경의 인간이 '''적절한''' 상황에서 '''적절한''' 판단을 내리고 '''적절한''' 덕을 함양할 때 우리는 비로소 '''적절한''' 행복에 이르게 된다.] [[논리학]]과 [[삼단논법]]의 창시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체계를 닦아놓은 논리학은 르네상스 시대를 거쳐 '형식논리학'의 틀을 이루게 된다. 이후 [[프레게]], 조지 불, [[버트런드 러셀]]이 등장하여 '기호논리학'으로 불리는 현대 논리학의 새로운 조류가 나타날 때까지는 사실상 이 분야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문학]]에서는 시학을 통해 체계적인 문학[[비평]]의 효시가 되었다. 시학에서 비극의 작동원리를 [[카타르시스]]라고 규정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허나 카타르시스는 전문을 걸쳐 단 한 번 언급되어질 뿐이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오히려 시학 전체에 걸쳐 [[플롯]]을 가장 강조하였다. 시학은 현재의 관점으로 보면 제작학적인 성격이 짙으므로 본격문학보다는 대중문학 이론에서 더 자주 언급된다. 스승인 플라톤이 예술 곧 '모방'은 이데아의 모방인 현실세계의 2차적 모방이라고 규정하고 천시하고, 그 때문에 '국가'에서 시인추방론을 역설한 것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다루지만 시(서사시)는 보편적인 것을 다루므로 시가 더 철학적이다'라고 하여 문학의 존재가치를 역설하였다. 무슨 말이냐면, 실제 역사는 우연적인 인간의 행위에 크게 좌우되며, 불완전한 인간의 의식이나 행위가 그 대상이 되기 때문에 전범으로 삼을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학은, 물론 최고 수준의 문학이 그 기준이지만 대단히 아름다우며 지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완성되어 있기 때문에 역사보다 문학이 더 우월하고 추종할 만하다는 것이다. [[카이사르]]가 전쟁 중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태워먹어서인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은 원전이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 그때 불탄 서적들은 당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소장되기 위해 대기 중이었던 책들이었고 그나마 후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에게 선물로 페르가몬 도서관의 장서 20만 권을 선물했기에 큰 타격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 사후 좀 복잡하게 저작들이 여기저기 흩어진 이유는 아리스토텔리스가 아테네에서 추방당한 탓이 컸다. 이후 지하 창고 안에서 썩어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를 책수집 덕후가 사들여서 수집하고 보관한 덕에 지금 남아있는 정도의 저작이 남게 되었다고 한다. 그 남아있는 저작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저술했다고 알려진 저작의 반도 안 된다는 얘기도 있는데 후에도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대화편들이 소실되어서 어려운 강의 노트들만 남았다고 개탄하기도 한다.[* 다만 깊게 파고들 경우,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보다 더 명료한 면도 있다. 플라톤은 대화편이라는 장르의 특성상, 어디까지가 저자의 생각을 반영하는지가 불명요할 때가 있으며, 심지어 대화편을 통해 일종의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는 해석도 있다. 가령, 플라톤 대화편 속에서 소크라테스와 논쟁하는 인물들은 플라톤의 생각을 '전혀' 반영 안하는지, 만약 한다면 얼마나 하는지가 불명료하다. 심지어는 플라톤이 대화편을 통해 보여주려 한 것은 '탐구하는 삶'이였을 뿐, 특정한 '플라톤 학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학설도 학계에서 나름의 영역을 확보했다.] 일단 로마 시대까지만 해도 세네카나 [[키케로]] 같은 로마 철학자들이 그의 서적을 필사하기도 했다.[* 이야 글빨 좋다! 하고 감탄했다고 한다. 물론 지금까지 남아 있는 연구서가 아니라 대중들을 위한 책을 읽고 한 말이다.] 남아있는 거라곤 '올림픽의 승자들' 같은 철학의 입장에서 보면 쓰잘데기 없는 기록뿐이라고도 하는데(철학이 아니라 사학의 사료로 쓰자면 쓰잘데기 없는 기록은 전혀 아니지만) 사실은 오히려 전문연구서적이 더 많이 남은 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