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르카디우스 (문단 편집) === 에우트로피우스의 섭정과 [[가이나스]]의 야심 === >어떤 사람은 시골의 저택을 바쳐 아시아의 관직을 얻었고, 다른 사람은 아내의 보석을 바쳐 시리아의 관직을 얻는다. (...) 유트로피우스의 공식 대기실에는 각 지방의 관직 가격을 알려주는 요금표가 걸려있다. > >클라우디아누스, [[매관매직]]을 한탄하며[* 클라우디아누스는 스틸리코가 고용한 시인이자 선전가(panegyrist)로 스틸리코를 찬양하였지만 에우트로피우스, 루피우스, 알라리쿠스 등 고용주의 적은 비판하였다.] 같은 해인 395년, [[동고트|동고트족]] [[가이나스]](Gainas)가 이끄는 로마군대가 황제를 뒤에서 조종하는 프라이펙투스 루피누스를 암살한 이후, 루피누스가 행사하던 지위는 대머리 노인 [[환관]]이자 의전관인 에우트로피우스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에우트로피우스는 무능한 황제를 조종하면서, 지위강화를 위해 자신이 교육한 [[프랑크족]] 출신의 미녀 [[아일리아 에우독시아]][* 불과 몇 년 전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정황상 매우 높은 확률로 암살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패사한 [[플라비우스 아르보가스트]]의 누이이다(...)](Aelia Eudoxia, ? - 404년)와 아르카디우스를 결혼시켰다. 이 결과, 그의 영향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하지만 황후가 된 에우독시아 역시 야심있는 여인답게 남편 아르카디우스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시키려고 노력했고, 에우트로피우스가 그녀를 협박하자 그녀는 그를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400년 초에 가이나스는 막후 공작으로 에우트로피우스를 실각시키고 아르카디우스로부터 군 사령관 직을 빼앗다시피하여 얻게 되었다[* 가이나스는 서방의 스틸리코와 같은 권력을 동로마에서 누리려고 하였다.]. 자연히 동로마의 고관들과 [[콘스탄티노플]]의 시민들은 게르만 족 군대의 세력 강화에 불쾌하게 반응했고, 결국 400년 7월 12일,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나 수많은 게르만 족 병사들이 학살당하고 말았다. 이때 가이나스 역시 실각하여 추방되었고 동로마 군부에서의 게르만족 출신의 세가 급격히 위축되었다. 이후, 새로운 권력은 아르카디우스의 아내였던 에우독시아와 프라이펙투스인 아우렐리아누스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참고로 이스탄불에 있었던 아르카디우스 기념탑은 이 숙군 작업을 아르카디우스의 승리로 간주해서 세운 승리 기념탑이다. 물론 이 숙군 작업이 5세기의 동로마가 서로마처럼 되지 않는 데에 상당한 역할을 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도 창칼 맞대고 싸우는 일반적인 전쟁이나 전투가 아닌데도 승전기념비를 세운 것은 부족한 권위를 채우기 위한 정치적 선전이라고 볼 수 있다.[* [[영어 위키백과]] '[[https://en.wikipedia.org/wiki/Column_of_Arcadius|Column of Arcadius]]'에 'The column's construction was begun after 401 to commemorate Arcadius' '''triumph over the Goths under the renegade magister militum Gainas in the wars of 399–401.''''라는 대목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