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디다스 (문단 편집) == 역사 == || {{{#!wiki style="margin: -5px -10px -6px" [[파일:2GIYxz6.jpg|width=100%]] }}} || || '''창립자 아돌프 다슬러''' || 1900년, 아돌프 다슬러(이하 아디)는 독일 [[바이에른]] 주 헤르초게나우라흐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신발 공장의 봉제 기술자였고 어머니는 세탁소를 운영했다. 이런 가정 환경에서 아디 다슬러는 섬유 가공, 신발 세탁, 제단, 제본 등을 자연스럽게 터득했다. 당시 독일의 신발 산업은 하향세였기에 아버지는 아들이 [[제빵사]]가 되길 원했다. 하지만 1920년 운동에 대한 열정이 강하고 자신 역시 운동 선수였던 아디 다슬러는 너무 쉽게 닳아버리는 운동화 대신 내구성이 강한 운동화를 만들고 싶어 스무 살 때부터 어머니의 세탁실에서 혼자 트레이닝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설립자 아디 다슬러는 형 루돌프 다슬러(이하 루디)와 함께 1924년, [[뉘른베르크]] 인근 헤르초게나우라흐에 위치한 자택에서 축구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디는 뛰어난 손재주를 이용해 질 좋은 [[축구화]]를 만들어냈고, 외향적인 성격의 루디는 그런 동생이 만든 축구화를 팔기 위해 독일 전역을 돌아다니며 축구화 생산 주문을 받았다.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후 집에 돌아온 형 루디 다슬러는 동생의 신발 사업에 동참해 둘은 같은 해 ‘다슬러 형제 신발 공장(Gebrüder Dassler Schuhfabrik)’을 설립했다. 훗날 아디다스의 전신이 된 이 회사는 아디 다슬러의 가족을 포함한 12명의 사람들이 매일 50켤레의 운동화를 제작하는 가내 수공업 형태였다. 아디는 조용하고 꼼꼼한 신발 개발자였고, 형 루디는 외향적인 성격의 세일즈맨이었기에 둘은 서로의 장점을 살려 회사를 운영했다. 아디 다슬러는 자신이 만든 제품들을 선수들이 착용하기 전에 늘 테스트를 직접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가장 좋은 제품을 선수들에게 제공하겠다던 그의 신조(Only The Best For The Athlete)는 지금도 아디다스 브랜드 철학으로 자리잡고 있다. 본인 역시 열정적인 운동 선수였던 아디는 선수들과 그들의 요구에 늘 귀를 기울였다. 1924년 다슬러 형제의 운동화 공장 창업 후, 다슬러 형제는 운동 선수들을 위한 최적의 신발을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특히 아디 다슬러는 보다 더 가벼운 신발을 만들기 위해 저울을 들고 다니며 원단을 찾아 다녔고, 선수와 트레이너들을 직접 만나 자신이 만든 신발의 성능을 직접 테스트했다. 그 결과, 그는 딱딱한 가죽 대신 부드럽고 가벼운 고무 원단으로 대체해 운동화 제작에 사용했다. 이 고무 운동화는 아디다스 스포츠화의 효시였다. 1925년, 아디는 직접 손으로 스파이크를 박은 러닝화와 가죽 징을 박은 축구화를 개발해 특허권을 갖게 되었다. 이 신발들은 트랙과 필드에서 뛰어난 성능을 과시했는데, 특히 아디의 스파이크 러닝화가 처음 빛을 본 것은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였다. 리나 라드케(Lina Radke)가 이 신발을 신고 여자 800m 달리기에서 세계 최고 기록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또한 1932 [[LA 올림픽]]에서 아서 요나스(Arthur Jonath)도 이 신발을 신고 남자 100m에서 동메달을 따면서 다슬러 형제가 만든 신발은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1933년에 형제가 [[나치당]] 당원이 되면서 사업은 더욱 번창했다.[* 나치는 [[유럽]] 정복을 위한 병역 자원을 마련하고자 젊은이들의 체력 및 협동심을 기를 스포츠를 장려했고, 스포츠 용품 업자인 다슬러 형제는 그 수혜자가 된 것이다.] 다슬러 형제의 나치 경력과 관련해서는 대체로 루디가 나치의 사상에 공감한 반면, 신발 밖에 관심이 없던 아디는 그저 신발 장사의 수단으로 [[나치당]]에 가입한 측면이 강하다고 한다. [[1936 베를린 올림픽]]에서는 [[독일]] 국가대표 선수들 대부분이 아디 다슬러가 만든 운동화를 신었고, 독일 올림픽 위원회는 다슬러 형제의 신발을 신겠다는 선수들의 요구에 따라 다슬러 형제 신발 공장에서 스포츠화를 공급받았다. 아디는 이 당시 최고의 육상 스타이자 흑인 선수인 미국의 [[제시 오언스]](Jesse Owens)에게 자신의 운동화를 보여주기 위해 [[바이에른]]에서 [[베를린]]에 있는 선수촌까지 직접 차를 몰고 찾아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아디 다슬러는 제시 오언스에게 자신의 스파이크 러닝화를 보여주며 경기에서 신어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결국 [[제시 오언스]]는 이 스파이크 러닝화를 신고 남자 100m, 200m, 400m 계주와 멀리뛰기 종목에서 모두 [[금메달]]을 획득해 베를린 올림픽 최고의 스타가 됐다. [[제시 오언스]]가 신은 다슬러 형제의 신발은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흑인이 올림픽에서 우승하는 것을 싫어한 [[아돌프 히틀러]]를 엿먹인 [[제시 오언스]]에게 자신의 신발을 제공함으로서 그 우승에 일조하기도 하였다.[* 이때 당시 인종차별주의자였던 [[히틀러]]가 [[제시 오언스]]와의 악수를 거부했다는 썰이 있는데 이건 그냥 국가 수반이 사적으로 초청하는 것은 IOC 의정에 위반되기에 첫 번째 메달 수상자를 제외하곤 그와 만나볼 기회가 없었다. 오히려 [[오언스]]는 [[히틀러]]가 본인을 친근히 대해줬고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본인을 냉대했다고 깠다.] 이때부터 세계 각국의 선수들이 다슬러 형제의 운동화를 신길 원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1939년까지 다슬러 형제는 매년 20만 켤레 이상의 운동화를 판매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전쟁이 길어지자 형제의 사업 여건은 점점 어려워졌다. 이런 상황 속에서 형제는 회사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충돌하기 시작했다. 특히 루디는 아디의 아내가 회사의 경영에 간섭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리고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때, 루디는 군대에 끌려갔지만 아디는 징집되지 않았기에 루디는 아디와 제수가 경영권을 차지하기 위해 수를 썼다고 생각했다. 거기다가 1945년 7월에 루디는 [[미군]]에게 잡혀 [[슈츠슈타펠|SS]]로 오해 받아 포로수용소에 1년 동안 감금된다. 루디의 소속 부대가 패전에 즈음하여 재편성되면서 [[SS]]에 배속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루디는 [[독일]]의 패전을 직감하고 탈영하여 고향에 돌아왔으나, 이 때문에 [[게슈타포]]에게 끌려가 [[다하우|다하우 수용소]]에 끌려가던 중 독일의 패전을 맞이하게 되고, SS의 최후의 발악으로 인해 총살당할 뻔 하였지만 독일군 트럭 운전사의 기지로 [[미군]]에게 발견되어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고향에 돌아와 미군에게 다시 체포된다. 루디는 이 모든 일이 동생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석방되자마자 아디를 나치 협력자로 밀고했지만 아디는 [[유대인]]계 시장(市長)을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벌을 받지 않았다.[* 아디는 전쟁 말기 자신의 직원들을 향토방위군 훈련에서 열외시키기 위해 훈련 시간마다 초과 근무를 시켰다는 일화도 있다.] 결국 루디는 집에서 나와 강건너의 다슬러 공장을 차지했고, 그를 따르는 사원들을 데리고 독립했다. 아디는 자신의 이름과 성에서 글자를 따서 [[아디다스]]를 만들었고, 루디는 [[푸마(브랜드)|푸마]]를 만들었다. 이렇게 다슬러는 [[아디다스]]와 [[푸마]]로 나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두 회사간의 화해는 2000년대에 들어서야 겨우 이루어지게 되었다.[* 1974년 루디의 사망 당시 전화통화를 통해 아디가 형을 용서하겠다고 하며 형제간의 화해가 있었다고는 한다. 그러나 루디의 장례식 당시 아디 본인은 참석하지 않고 딸 한 명이 가족 대표로 참석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두 회사 모두 다슬러 집안의 손을 떠났다. 하지만 역사적으론 같은 가문이다.] 여담으로 둘 다 본사가 처음에 사업을 시작한 헤르초게나우라흐에 있다. 참고로 ADIDAS의 뜻이 국내에선 'All day I Dream About Sports'라고 알려지기도 했는데, 이는 잘못된 사실로 실제 의미는 창립자 아디 다슬러 별명인 “Adi(Adolf)”와 성인 Dassler의 앞글자 “Das”의 6글자를 합친 것이다. 미국의 유명 [[뉴메탈]] 밴드 [[Korn]]의 대표곡 중 'A.D.I.D.A.S.(All Day I Dream About Sex)'가 있어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브랜드명을 혼동했을 가능성이 있다. 애초에 아디다스는 독일 기업인데 영어로 약어를 지었을 리가 없다. 사업가적 기질을 가진 루디와 달리, 아디는 기술자적 자질이 있었기에 아디다스 설립 후 아디의 부인 캐테 다슬러가 아디다스의 경영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한편, 아디의 아들 호르스트 다슬러는 [[멜버른 올림픽]]에서 수완을 발휘한 이후 아디다스 프랑스의 매니저를 맡게 되는데 그는 야심가로서 보수적인 경영을 추구하던 부모와 충돌이 잦았고 독일의 아디다스 본사와 프랑스의 지사는 독립적으로 제품을 개발하거나 판매하여 사업상 충돌하는 경우도 있었다.[* 가족회의를 통해 조정되고 최종적인 결정은 어머니 캐테를 거치긴 했다. 물론 호르스트는 겉으로는 따르는 척 하면서 뒤로는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켰다. 캐테는 종종 '''아들 때문에 힘들어요'''하면서 하소연했다고 한다.] 1949년, 프라이부르크(Freiburg) 제화 회사를 대신하여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의 공식 납품업체가 된 아디다스는 [[1954 스위스 월드컵]]에서 또 한 번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현재까지도 아디다스가 독일 국가대표팀을 후원한다. 시간이 흘러 아디다스는 [[독일]] 태생 장기 후원 브랜드이기에 아디다스가 아닌 타국의 브랜드 유니폼을 입는다면 그건 팀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행위라는 평도 생겼다.] [[서독]] 대표팀은 아디 다슬러가 만든 축구화를 신고 출전했다. 서독 대표팀은 조별 리그 2차전에서 당시 세계 최강이던 [[헝가리]] 팀에게 3대 8로 대패했다. [[터키]]와 플레이오프를 치르며 힘겹게 8강에 오른 뒤 [[서독]]은 [[유고슬라비아]]와 [[오스트리아]]를 꺾고 결승에 진출했다. [[헝가리]]가 워낙 막강했기 때문에 [[서독]]의 우승을 점치는 이들은 드물었다. 하지만 경기 당일 변수가 생겼다. 경기가 벌어진 베른에 폭우가 쏟아진 것이다. 경기 시작 이후 연속 두 번의 골을 넣어 주도권을 잡은 팀은 [[헝가리]]였지만, 폭우로 인해 그라운드가 진흙탕으로 변해가면서 축구화 바닥의 스터드(Stud, 징)를 교체할 수 있는 축구화를 신은 [[서독]]이 힘을 내기 시작했다.[* 당연히 세계 최초의 스터드 교체형 축구화다.] 전반이 끝나고 [[스터드]]를 교체한 서독의 경기력은 후반으로 갈수록 더 살아났다. 2대 2 동점이었던 후반 39분, [[헬무트 란]]이 결승골을 넣으며 [[헝가리]]를 무너뜨렸다. 이 승리는 [[서독]]의 승리이자, 아디다스 기술의 승리였다. 패전국으로 의기소침하게 살아가던 [[독일]] 국민들에게 대표팀의 월드컵 우승은 희망을 안겨주었다.[* 훗날 독일 대표팀이 [[메스암페타민]]을 복용하고 경기를 뛰었다는게 밝혀지며 평가가 많이 하락했다. 당시 [[축구]]에서 약물 복용이 규정 위반은 아니였지만 암묵적으로 신사의 스포츠라 불리던 축구에선 불명예적인 행위였다. 그래도 [[독일]]인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다는 점과 아디다스 축구화가 독일 대표팀에 어느정도 기여했다는건 부정할수 없다.] 후에 이 일화는 [[베른의 기적]](The Miracle Of Bern)이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영화에는 [[아디 다슬러]]가 축구화의 스터드를 교체할 수 있다는 걸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월드컵]]을 통해 아디다스는 [[축구]] 전문 브랜드로 급성장하게 되었고 독일 대표팀이 신은 아디다스의 징 박힌 축구화(Sports Shoe With Screw-In Studs)는 전 세계적으로 주문이 쇄도해 한 해 45만 켤레 넘게 생산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아디다스는 스포츠 의류 분야로도 사업을 확장했고, 1963년에는 [[축구공]]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 아디다스의 [[텔스타]](Telstar)가 [[공인구]]로 사용되면서 아디다스 [[축구공]]은 모든 [[FIFA]] [[월드컵]]의 공인구로 채택됐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아디다스는 ‘아디다스 축구화를 신지 않으면 일류 선수가 아니다’는 말이 선수들 사이에서 나올 정도로 스포츠 용품 분야에서 독주했다. 1978년,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아디 다슬러의 뒤를 이어 다슬러 가문의 경영이 시작됐다. 아디 다슬러의 사망 6년 후 아디 다슬러의 아내 카데 다슬러(Kathe Dasselr)의 사망으로 그녀의 경영이 막을 내렸다. 이후, 아디다스 CEO 자리에 아디 다슬러의 아들 [[호르스트 다슬러]](Horst Dassler)가 올랐다. 그는 스포츠 용품 전반으로 사업 범위를 무리하게 확장했고 [[월드컵]]과 [[올림픽]]에서 아디다스 물품 독점 계약에 열을 올렸다. [[아디 다슬러]]가 살아있을 당시 아버지의 사업을 도운 [[호르스트 다슬러]]는 스포츠화 제작에 주력한 그의 아버지와는 달리 토털 스포츠 용품 사업으로 진출하려는 욕심이 많아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의 그늘을 피해 [[프랑스]] 법인으로 도망가다시피 했는데 이때 호르스트 다슬러는 [[아레나(브랜드)|아레나(Arena)]]라는 [[수영]] 전문 브랜드를 설립하기도 했다. 이런 마케팅으로 그는 스포츠 마케팅의 1인자가 되었다.[* 호르스트는 스포츠 상업화의 원흉으로 꼽히기도 한다.] 또한 가죽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농구]]화[* 당시 [[미국]] [[농구화]] 시장은 [[컨버스]]가 석권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만들던 [[농구화]] 재질은 [[캔버스|천]]이었다. 지금도 [[컨버스]] 매장에서 볼 수 있는 디자인의 [[캔버스화]]다.] '''[[아디다스 슈퍼스타|슈퍼스타]]'''[* 의외로 수퍼스타가 농구화로 출시한 모델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슬램덩크(만화)|슬램덩크]]에서 [[안한수]]가 [[강백호(슬램덩크)|강백호]]와 점프슛 대결을 할 때 착용한 모델도 슈퍼스타 하이탑 제품인 Adidas Pro Model이다. 이는 훗날 2015년 2월에 퓨쳐스타라는 이름으로 [[리메이크판]]이 나왔다.]는 [[농구]] 선수들의 대호평을 받으며 아디다스는 [[미국]] 시장까지 석권했다. 심지어 '''[[마이클 조던]]'''은 어렸을 때 [[나이키]]보다 오히려 아디다스 농구화를 선호하였다고 한다.[* 때문에 [[컨버스]]도 가죽으로 [[농구화]]를 만들어야 했다. [[매직 존슨]]과 [[줄리어스 어빙]]의 시그네쳐화는 컨버스에서 제작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6px" [[파일:external/s3-us-west-2.amazonaws.com/adidas-originals-superstar-80s-1.jpg|width=100%]] }}} || || '''아디다스 최고의 히트작이자 영원한 스테디셀러, 슈퍼스타''' || 그러나 새로운 유행에 둔감한 채 전문적인 스포츠 용품에만 관심을 가짐으로 인해 일반 소비자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는 점[* 조깅이 [[미국]]에서 유행이던 시절 '''[[조깅]]은 스포츠가 아니다'''라며 아디다스가 조깅화의 출시를 망설이는 사이, 후발 주자 [[나이키]]는 조깅 열풍에 편승하여 아디다스를 추월하고 [[에어 조던]]을 출시해 농구화 시장을 평정한다.]과 결국에는 아디다스 전체의 경영을 이어받게 된 호르스트가 무리하여 [[미국]] 총판의 영업권을 구입해버린 점 등으로 인해 회사의 재정 상태가 어려워진 점 등으로 인하여 결국 아디다스는 혜성같이 등장한 [[나이키]]에 그 지위를 빼앗기고 아디다스는 '''마당의 잔디를 깎을 때 아저씨들이 입는 옷'''으로 인식될 정도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1987년 호르스트가 사망한 후 여동생들 간 분쟁이 일어나면서 아디다스는 혼란에 빠졌다. 최고경영자(CEO) 없이 4년간 표류하던 아디다스는 1992년 최악의 적자를 기록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6px" [[파일:external/ballislife.com/run-dmc-wearing-adidas.jpg|width=100%]] }}} || || '''아디다스 옷을 입은 Run DMC''' || || {{{#!wiki style="margin: -5px -10px -6px" [[파일:external/farm4.staticflickr.com/15349293122_235fdb1552_o.jpg|width=100%]] }}} || || '''1986년 Run DMC의 콘서트에서 팬들이 아디다스 슈퍼스타를 들고 열광하고 있다.''' || 아디다스는 이 시기 본업인 스포츠가 아닌 다른 곳에서 명성을 쌓는다. 바로 [[패션]]. [[동부 힙합|뉴스쿨 힙합]]의 시조격인 그룹 [[Run DMC]]가 아디다스의 파이어버드 저지를 입고 슈퍼스타, 캠퍼스 등의 스니커즈를 신고 활동하면서 힙합은 기존 방송용 [[디스코]] 패션에서 벗어나 [[스니커즈]] 문화와 [[스트리트 패션]]이 팽창하게 되고 아디다스는 [[언더그라운드]] 문화, 스트리트 패션의 아이콘이 된다. Run DMC는 아디다스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My Adidas라는 노래를 만들기도 했는데, 당연히 아디다스는 이들과 광고까지 찍으며 이를 적극적인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했고, 이 노래는 화면과 [[라디오]]를 타고 엄청난 파급효과를 주었다. 당시 런 디엠시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중절모와 아디다스 운동화는 전 세계 힙합퍼(Hiphoper)들을 상징하는 아이템이 됐다. 아디다스가 제작한 런 디엠시 라인의 시그니처(Signature) 제품들은 전 세계로 팔려나가 마이클 조던이 나이키에게 벌어다준 만큼의 수익을 아디다스에게 안겨주었다. 아디다스의 트레이드마크인 삼선 트레이닝 복을 비롯한 아디다스 의류의 시작은 베르나드 타피에의 노력의 결과라는 평을 받는다. 런 디엠시와 아디다스의 콜라보레이션은 선수들을 위한 스포츠 브랜드에 국한된 아디다스의 이미지를 대중적인 브랜드로 확장시켜주었다. 아디다스를 창립한 아디 다슬러 가문의 경영권을 인수한 1990년 전문 경영인 베르나르 타피(Bernard Tapie)[* 프랑스 사회당 의원이기도 하며, 1986~1994년까지 프로축구팀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회장도 역임했다. 다만 마르세유를 소유할 당시 상대팀 선수를 돈으로 매수해 승부를 조작하고, 부패 및 탈세, 횡령 등의 혐의로 감옥에서 살고 피선거권을 박탈당한 인물이다. 2021년 10월 3일 78세의 나이에 암으로 사망했다.]가 새로운 아디다스의 주인이 됐다. 그는 창립자 아디 다슬러와 더불어 현재의 아디다스를 만든 주역이다. 절치부심 한 아디다스는 위기를 극복하고자 나이키 출신의 베테랑 마케터 & 디자이너인 랍 슈트라서(Rob Strasser)와 피터 무어(Peter Moore)를 영입하여, 1991년 '''Equipment'''[* 지금의 퍼포먼스 라인의 시발점이 된다.] 브랜드를 런칭하고 로고를 기존 불꽃 모양[* 사실은 불꽃이 아니라 Trefoil이라는 식물의 잎을 심볼화한 것. 100개 이상의 안건 중에 채택되었으며 세 줄기가 각각 미주, 유럽-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를 상징했다고 한다. 하지만 모양이 불꽃이라 봐도 이상하지 않은데다, 한국에서는 한 시대를 풍미한 만화 [[피구왕 통키]]의 연상 효과라도 작용한 것인지 불꽃 마크로도 많이 불린다.]의 트레포일에서 산(山) 모양의 삼선 로고(Three Bars Logo)로 교체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인다. 이후 1994년 타피의 친구인 로베르 루이 드레퓌스(Robert Louis-Dreyfus)가 새로운 CEO에 오르면서 아디다스는 드디어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사업이 점차 확장되자 아디다스는 1997년 동계 스포츠 용품 제조사인 살로몬(Salomon)을 인수했고 회사 이름을 아디다스 살로몬(adidas Salomon)으로 변경했다. 아디다스는 차후 [[스트릿 패션]]에 주력하는 '''Adidas Originals''' 라인을 생산하게 되고, 많은 셀러브리티와 디자이너의 콜라보레이션 등으로 공격적인 마케팅을 진행했다. [[폴 매카트니]]의 딸인 여성복 디자이너 [[스텔라 매카트니]]가 디자인한 라인이 특히나 유명하며, 2010년대에는 제레미 스캇이 내놓은 라인이 인기를 끌기도 했다. 오리지널스 라인은 대개 복고풍의 트렌디한 패션을 주도했고, 덕분에 아디다스는 패션 분야에서만큼은 점유율에서 거의 유일하게 나이키를 이긴다. 2005년에는 살로몬 사업 부문을 핀란드의 아머 스포츠(Amer Sports)에 매각하면서 회사명을 다시 아디다스로 변경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6px" [[파일:external/marekkrysa.blox.pl/beckham1.jpg|width=100%]] }}} || || '''아디다스의 주력 모델 중 한 명인 데이비드 베컴''' || 한동안 아디다스는 본업인 스포츠 분야에선 여전히 심각한 부진을 겪는다. 적어도 축구에서는 1인자라는 자부심이 있었으나, 뒤늦게 축구 시장에 뛰어든 후발주자 나이키가 'R9' [[호나우두]]를 내세워 축구 산업에 전념하면서 야금야금 점유율을 내주더니 2000년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축구에서도 [[콩라인|2인자]]로 밀리게 됐다가, 2010년대 들어와 다시 1인자로 올라섰다. 아디다스가 신경을 쓰지 않던 [[골프]] 분야를 나이키가 [[타이거 우즈]]를 내세워 대박을 터트리면서 아디다스는 더욱 궁지에 몰리기도 했다. 이에 아디다스는 패션 라인인 오리지널스와 라이프스타일 부문에 집중하는 한편, 퍼포먼스 라인의 기술혁신을 계속하여 이를 돌파했으며, 2004년에는 '''Impossible is Nothing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캠페인을 시작하였다. 결국 아디다스는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거대한 [[미국]] 시장을 홈그라운드로 하는 나이키에게 밀려 스포츠용품 업계의 [[콩라인]]이다.[* 아디다스 그룹이 [[리복]]을 인수한 것도, 미국 시장에서 비교적 경쟁력을 가진 브랜드인 리복을 통해 미국 시장 점유율을 높여보려는 시도였다.] 아디다스가 나이키를 넘기에는 힘들어 보인다. 2014년 미국 매출액만 보더라도 나이키 118억달러, [[언더 아머]] 26억달러, 아디다스 16억 달러로 아주 밀리는 상황이었다.[[http://www.businesspo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8397|#]] 이처럼 미국 점유율이 매년 떨어진다는 점에서 문제가 심각해보였으나, 아디다스 입장에선 다행스럽게도 2015년 등장한 울트라부스트를 시작으로 이지 부스트, NMD 등 부스트 중창을 장착한 신발들이 나오고 튜블라 라인도 히트를 치면서 2016년 3분기에는 언더 아머를 다시 제쳤다. 아디다스는 나이키를 넘기 위해 수많은 유명 디자이너들의 영입으로 패션 분야의 지분을 점차 늘려가며 굳히기에 들어갔고, 축구 시장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기존의 [[레알 마드리드]], [[바이에른 뮌헨]]에 이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벤투스]], [[올림피아코스 FC]]와의 대형 계약을 맺어 영국,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의 최정상 클럽을 모두 후원하는 브랜드가 되었다. 또한 2014 브라질 월드컵에 만든 'All in or nothing' 캠페인에서 마침내 나이키를 이기면서 꿈도 희망도 없던 2000년대 중반에 비하면 미래가 긍정적인 상태다. 2006년, [[리복]]을 인수해 북미 시장 점유율을 끌어 올린 아디다스는 2011년엔 아웃도어 전문 브랜드 파이브텐(Five Ten)과도 합병했다. 2013년, 아디다스는 3년에 걸친 연구 개발 끝에 달리기에 가장 적합한 신소재인 부스트(Boost)를 개발해 에너지 효율이 뛰어나고 쿠션감이 좋은 운동화 에너지 부스트(Energy Boost)를 런칭했고, 2014년에는 브라질 월드컵 공인구인 브라주카(Brazuca)와 함께 새로운 축구화 배틀팩(Battle Pack)을 선보였다. 2001년부터 CEO를 맡고 있던 헤르베르트 하이너가 물러난 이후, 2016년 카스퍼 로스테드[* 덴마크 출신으로 미국 [[하버드대]]를 나온 그는 2016년 아디다스 최고경영자가 되기 전까지 스포츠와는 관련이 없었다. [[HP]]에서 일하다 2005년 세제로 유명한 독일 기업 [[헨켈]]에 합류했고, 3년 만에 헨켈 최고경영자로 임명됐다. [[2008년 글로벌금융위기]]로 소비재 수요도 급감하던 시기였다. 그는 과감한 [[구조조정]]과 사업 재편으로 어려움을 극복했다. 그가 경영하는 8년 동안 헨켈 시가총액은 3배 가까이 뛰었다. 이는 아디다스가 그를 영입한 이유이기도 했다.]가 CEO로 부임한 이래 업계 1위 탈환을 목표로 아디다스는 본격적인 체질 개선에 들어갔고, 다시금 상승세를 탔다. 로스테드는 공장을 독일로 옮겨 전자동화를 도입, 인건비를 대폭 낮추었다. 아디다스는 2015년 3억100만켤레의 운동화를 생산했고, 2020년까지 매년 3000만 켤레씩 생산을 늘려 나갈 전망이다. 아시아의 인건비가 상승하고 로봇 생산비가 낮아짐에 따라, 유럽과 미국 등에 로봇 공장을 설립하는 계획을 추진해왔다. 패션 업계에서는 24시간 생산이 가능한 로봇 공장이 최신 트렌드를 즉각 반영해 빠르게 제작하고 유통하는 패스트 패션에 적합하다고 본다. 유럽과 미국 등 소비시장과 가까워 아시아에서 생산해 운송하는데 따른 비용과 시간, 이산화탄소 배출량도 줄일 수 있다. 경쟁사 나이키 역시 로봇 공장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또 브랜드 이미지 재고를 위해 스폰서십을 대폭 손보았으며, 셀러브리티와의 스폰서십을 강화하여 애슬레저 시장을 선점하였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15/0003897323?sid=104|#]] 그 결과 아디다스는 북미 지역의 점유율을 빠르게 회복했으며, 2017년에는 중국 시장에서 29% 성장, 북미 지역에는 27% 성장세를 보였다.[[http://www.itnk.co.kr/news/articleView.html?idxno=56704|#]] 2017년 아디다스의 영업이익은 무려 219% 증가하는 등 경쟁사 나이키를 다시 바짝 추격했다. 여전히 나이키의 어패럴 브랜드 순위가 1위지만, 나이키의 평가 가치가 몇몇 악재로 2018년 -12%를 기록한 반면, 아디다스는 무려 41%가 성장하여 4위를 기록한 상태이다.[[http://www.itnk.co.kr/news/articleView.html?idxno=56874|#]] 2019년에는 17% 성장하며 3위를 기록했다.[[https://brandfinance.com/knowledge-centre/reports/brand-finance-apparel-50-2019/|#]] 2018년에도 연매출 19억1000만 유로의 매출을 올린 아디다스는 특히 두 주요 시장에서 성장했는데, 북미 매출은 46억 8000만 유로로 10% 증가, [[아시아]]-[[태평양]] 지역은 71억 4000만 유로로 12% 증가했다. 특히 [[중국]] 내 매출 증가율은 23%에 달했다. 그러나 유럽의 경우 매출액이 1% 감소해 최대 58억8000만 유로, 중남미에서는 14%로 떨어져 16억 3000만 유로에 머물렀다. 부문별로 보면 신발은 매출 1,278만 유로로 2017년 대비 3% 증가했다. 그러나 스포츠 장비는 6%로, 매출 822만 유로의 상승률로 가장 높은 성장률을 보인 상품이다. 2018년 아디다스는 온라인 매출을 늘리고 오프라인 매장을 줄여나갈 방침이라고 밝혔다. CEO 카스퍼 로스테드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온라인 매출을 오는 2020년까지 현재의 2배가 넘는 40억 유로까지 늘리기 위해 디지털 분야의 투자를 강화하겠다고 강조했다. 2017년 아디다스의 온라인 매출은 전년 대비 57% 증가한 16억 유로를 기록한 바 있다. 그는 "웹사이트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매장 중 하나다"며 "직원을 고용하고, 회사 자원을 배분하고, 기반시설을 지을 때 가장 우선순위로 작용한다"고 전했다. 아울러 로스테드 CEO는 2019년까지 오프라인 매장을 소폭 줄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또 2018년 초 미국 [[애틀랜타]]에 세운 두 번째 스피드 팩토리에서도 운동화를 생산한다. 뉴욕과 같은 도심에서 달리기하는 사람들을 위한 운동화다. 아디다스는 2020년까지 독일과 미국에 있는 두 개의 스피드 팩토리에서 각각 연간 100만 켤레의 운동화를 생산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2020년대 들어서 [[팬데믹]] 시기 나이키가 덩크와 에어조던1 등을 필두로 역대급 흥행에 성공한 반면 아디다스는 협업 라인들이 부진하고 이지부스트와 오리지널라인 제품도 예전만 못하면서 격차가 다시 벌어지고 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여성 라인에 [[BLACKPINK]]와 [[두아 리파]] 등을 앰배서더로 임명하는 등 10대 여성들을 상대로 상당한 마케팅을 벌이고 있다. 2021년 8월. 아디다스가 미국의 어센틱 브랜즈 그룹에 25억 달러(약 2조9천억 원)를 받고 [[리복]]을 넘기기로 했다고 보도했다.[[https://m.yna.co.kr/view/AKR20210813007000072?section=international/all|#]] 2022년 3월 알라스드헤어 윌리스가 최고 크리에이티브 책임자로 임명되었다.[[https://news.adidas.com/partnerships/alasdhair-willis-to-shape-future-of-adidas-as-chief-creative-officer/s/2dabba6e-ba8f-4e18-afef-467143fe0786|#]] 2023년 1월 1일부터 푸마의 CEO였던 비에른 굴덴이 신임 CEO로 임명되었다. [[카니예 웨스트]]와 [[이지부스트]]의 남은 재고 판매 계약을 체결하고 판매량이 부진하던 [[비욘세]]의 아이비파크와는 협업 연장을 중단시키는 등 적자폭을 개선해 나가며 적극적으로 위기에 대응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