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나키즘 (문단 편집) === 검은 깃발 === [[파일:4TF8gb7.png|bgcolor=white]] >왜 우리의 깃발은 검은색인가? 이것은 거부라는 '''그림자의 색'''이다.[* 누군가 자랑스럽게 어떤 국가나, 조직의 깃발을 치켜든다면, 찬란한 태양빛을 받아 펄럭이는 깃발 뒤엔, '깃발의 검은 그림자'가 생기며, 그것은 어떤 깃발일지라도 마찬가지다.] 검은 깃발은 모든 깃발에 대한 거부이다. 이것은 인류의 화합을 가로막고 대립 시키는 국민성에 대한 거부이다. 검은색은 국가와 집단에 충성이라는 이름으로 인류에 자행되는 끔찍한 범죄에 대한 분노이자 울분이다. 이것은 가식과 위선, 그리고 정부의 비열한 속임수에 은밀하게 모욕되는 인간 지성의 분노이자 울분이다. 검은색은 또한 비탄이다. 검은 깃발은 안정과 위대한 영광을 위해 기꺼이 피를 마신 조국에 대한 거부이며, 국가의 안과 밖에서, 그리고 전쟁에서 살해된 셀 수 없는 희생자들의 비탄이다. 이것은 노동의 결과가 강탈되어, 또 다른 인간을 도살하고 억압하는데 쓰이게 되는 현실에 대한 비탄이다. 이것은 폭압적인 계층 사회 안에서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마저 병들어 버린 현실에 대한 비탄이며, 세계를 밝힐 기회를 얻지 못한 채 꺼져버린 수많은 이성의 눈물이다. 이것은 위로할 길 없는 슬픔의 색이다. >---- >"왜 검은색 깃발인가?", 하워드 알드리치 [* (ed.), Reinventing Anarchy, Again, pp. 31-2] 아울러 아나키스트들은 '''[[검은색]]'''을 자신들의 고유색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는 오랫동안 검은색이 [[노동]]을 상징했고 국가들의 [[국기]]가 화려한 색들로 채워진 반면 이를 부정한다는 의미에서 검은 깃발은 19세기 후반 아나키스트들에 의해 널리 쓰였다. 그리고 항복에 대한 반대, 깃발 자체에 대한 반대의 의미에서도 검은 깃발은 널리 쓰였다. 실제로 검은 깃발은 과거 산업사회 이전부터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고 조직화된 노동자로서 존재해 왔던 집단은 다름아닌 [[광산]]의 [[광부]]들인데 이들이 종종 검은 깃발을 광산 표식으로 쓰곤 했다. 덧붙여 [[프랑스 혁명]] 이후 붉은 깃발이 [[혁명]]을 상징했고 붉은 깃발이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상징으로 쓰이게 되자 19세기 중엽부터 [[사회주의]]와 확연히 다른 노선을 걷게 된 아나키스트들은 붉은 깃발을 사용하기 좀 뭐한 감이 있었다. 그 전까지는 붉은 깃발도 자주 쓰였다고 한다. 그래서 사회주의 계열과는 다른 상징을 필요로 하게 되자 아나키스트들이 검은 깃발을 사용하는 빈도 또한 늘어났다고 한다. 이때 굳이 혁명의 상징을 거부할 이유가 없다며 끝까지 붉은 깃발을 사용한 [[표트르 크로포트킨]] 같은 사람도 있었다. [[파일:qRH83jR.png|width=440]] * Le Monde illustré지의 사건에 대한 삽화[* 흑백 [[http://www.compagnons-boulangers-patissiers.com/crebesc/du-pain-ou-la-mort-louise-michel/|원본]]에 채색한 버전이다.] 검은 깃발이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최초로 등장했는지는 불명확하나, 아나키스트들이 어째서 그것을 널리 사용하게 되었는지는 확실한 기록이 남아있다. 1871년 [[파리 코뮌]]의 유명한 참가자였던 루이즈 미셸[* Louise Michel, 가명 클레망스(Clémence) ][* '몽마르뜨의 붉은 처녀'(the red virgin of Montmartre)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이 아나키스트들에게 검은 깃발을 대중화시킨 장본인이다. 1882년 3월 18일 파리 코뮌을 기념하기 위한 공개 회의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붉은 깃발은 더이상 적절하지 않다. 고통의 검은 깃발을 들어 올리자."[* Edith Thomas, Louise Michel, p. 191] 다음 해 그녀는 그 말을 행동으로 옮겼다 아나키스트 역사가 조지 우드콕(George Woodcock)에 따르면 1883년 3월 9일 프랑스 파리 실업자들의 시위에서 그녀는 검은 깃발을 들고 등장했다. 실업자들의 야외 시위는 500여명의 규모였고, 미셸은 검은 깃발을 들고 "빵과 일이 아니면 총알을!"[* Bread, work, or lead]이라고 외치며 생제르망 도로를 시위대의 가장 앞에 서서 행진했다. 그리고 군중은 경찰에게 공격 당하기 전에 3개의 빵집을 공격했다. 그녀는 구속되어 6년의 독방 감금형을 선고 받았으나, 공공의 압력에 의해 곧 사면되었다.[* Anarchism, pp. 251-2] 같은 해 8월 출판된 리옹 지역 아나키스트 신문 Le Drapeau Noir[* The Black Flag]은 검은 깃발은 아나키스트 그룹 사이에서 유명한 심볼이 되었다고 보고했다.[* "Sur la Symbolique anarchiste", Bulletin du CIRA, no. 62, p. 2] 한편 러시아에서는 1905년 Chernoe Znamia[* black banner] 무브먼트가 등장하기 이전 까지는 검은 깃발이 쓰이지 않은 걸로 보인다. 그 해의 [[피의 일요일 사건(러시아)|혁명이 좌절된]] 이후 아나키즘은 또 다시 지하로 숨어들어 가야 했다. [[러시아 혁명|1917년의 혁명]] 동안 아나키즘의 검은 깃발은 재등장하게 되었다. 그 해 2월, 페트로그라드의 차리즘 타도 시위에서 아나키스트들은 검은 깃발에 다음과 같은 슬로건을 새기고서 참여했다. "권위와 자본주의를 타도하자!" 활동의 일환으로 아나키스트들은 임시정부의 반혁명 시도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대부분의 도시와 마을에 무장 분견대를 결성했고 이들은 '검은 수비대'[* Black Guards]로 불렸다. 그리고 조금 암울한 기록이 있는데, 1921년 2월에 아나키즘의 검은 깃발이 소련에 나타났다. 그 달엔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장례식이 모스크바에서 열렸었다. 2만여명의 참석자들이 그의 명예를 위해 검은 깃발을 들고서 행진 했는데, 거기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9KDvxYiwd-8|소련 아나키즘 최후의]] [[http://www.iisg.nl/collections/kropotkin/|기록들]] >'''Where there is authority, there is no freedom.''' >'''권위가 있는 곳에 자유는 없다.''' 크로포트킨의 장례식으로 부터 '고작' 2주만이 지나서 [[https://ko.wikipedia.org/wiki/%ED%81%AC%EB%A1%A0%EC%8B%9C%ED%83%80%ED%8A%B8_%EB%B0%98%EB%9E%80|크론시타트 반란]][[https://ko.wikipedia.org/wiki/%EB%B9%84%EB%B3%BC%EC%85%B0%EB%B9%84%ED%82%A4_%EC%A2%8C%ED%8C%8C_%EB%B4%89%EA%B8%B0|이 실패]]로 돌아갔고, 아나키즘은 소련에서 삭제되었다.[* [[https://libcom.org/files/Avrich,%20Paul%20-%20The%20Russian%20Anarchists_0.PDF|Paul Avrich, The Russian Anarchists]], p. 44, p. 124, p. 183 and p. 227] [[일제강점기]]의 한국 아나키스트들도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검은 깃발을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았다. 아나키스트 단체들은 세계 어느 곳을 막론하고 검은색을 자신들의 단체의 이름이나 상징에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일제하 한국 아나키스트 단체의 이름은 자연스럽게 흑기동맹, 흑색공포단, 흑풍회 등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