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쑨촨팡 (문단 편집) === 오성연군 총사령관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리즈시절의 쑨촨팡.jpg|width=100%]]}}} || || 리즈시절의 쑨촨팡 || 1924년 9월 [[강절전쟁]] 때 민월변방독판에 임명되어 [[중국 국민당]]이 안휘군벌을 지원하는 것을 막았으며 9월 7일 [[차오쿤]]의 정식 토벌령이 하달된 이후 강소독군 [[치셰위안]]을 원조하여 절강독군 [[루융샹]]을 축출했고 그 대가로 민절순열사 겸 절강군무독리에 임명되어 대대적으로 군세를 확장했다. [[2차 직봉전쟁]]에서 직계군벌이 몰락한 이후 1924년 11월 19일 치셰위안, 소요남, 유진화, [[두시구이]], 주음인, 채성훈, 왕보, 이병지와 연명으로 [[돤치루이]]의 임시집정 추대를 요청하였다. 11월 24일 임시집정에 취임한 [[돤치루이]]의 대표인 육군총장 [[우광신]]과 협상하여 절강독판에 임명, [[제노전쟁]]에서 치셰위안이 몰락하는 것을 방관했다. 하지만 새 강소독판 [[양위팅]],안휘독판 [[장덩쉬안]] 등의 전횡이 심각하고 이들이 오만불손하게 굴자 봉천군벌의 다음 목표는 자신이 될 것이라 여겨 양위팅에게 불만이 많던 강소성의 장령들 및 5성의 대표들 및 [[펑위샹]]의 국민군과 연계, 1925년 10월 [[손봉전쟁]]을 일으켜 강남의 [[봉천군벌]]을 축출하고 오성연군 총사령관 겸 강소 총사령이 되어 난징에 총사령부를 두고 20만 대군을 부리는 직예파 최대 군벌이 되었다. 1925년 10월 20일 소요남 등 20여명의 직계군벌 장령들과 함께 우페이푸를 14개성 토벌연군 총사령관으로 추대하였다. 10월에 산동독판 [[장쭝창]]과 진포선 일대에서 대대적으로 교전했고 11월, 쑨촨팡의 부하 사홍훈이 제남진수사 시공빈의 부대를 격파하고 시공빈을 사로잡았다. 쑨촨팡은 시공빈을 즉시 처형했다. 이후 강소성장에 진도유, 절강성장에 하초, 안휘성장에 왕보, 복건성장에 [[싸전빙]], 강서성장에 이정괴를 임명하고 오카무라 야스지를 고등군사고문으로 초빙했다. 그리고 연군 군관학교를 창설하고 직접 교장에 취임하는 등 군세 확장에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1926~1927년에 걸쳐 상하이의 노동운동을 잔혹하게 탄압했고 [[펑위샹]]과 연대하고 [[돤치루이]]를 용인하며 [[봉천군벌]]에 대해서는 적대정책을 취했다. 그의 통치는 보수적이라 과거 사대부들이 항아리에 화살을 던져 넣는 놀이를 진흥하는 등 옛 풍습을 지원하고 부녀자의 [[치파오]] 착용과 단발에 대해서 엄금하였다.[* 당시 단발머리한 여자=빨갱이란 인식이 강했었다. 그래서 군벌전쟁 와중에 단발머리 여자들을 빨갱이로 몰아 대량으로 처형하는 참극이 자주 벌어지곤 했다.] 그리고 [[두웨성]]을 비롯한 청방의 우두머리들과 결탁하여 흑색재료공사와 삼성공사를 수립하여 아편장사를 하는 것을 허락하여 이를 통해 많은 이득을 취했다. 원래 우페이푸를 지원하여 장쭤린을 공격하도록 사주하였으나 우페이푸가 장쭤린과 손잡고 [[펑위샹]]을 공격하자 이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펑위샹과는 딱히 원한이 없었기 때문에 1926년 [[직봉풍전쟁]]이 일어났을때 이를 방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