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쑨원 (문단 편집) == 기타 == [[인민복]]의 기원격인 [[중산복]]을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흔히 인민복은 [[중국]] 본토에서만 입는다고 알려져 있는데, 쑨원이 [[유럽]]의 사냥복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설과 [[일본]]에 거주할 당시 [[가쿠란]]에 영향을 받아서 "우리도 저런 실용적인 옷이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만들어 낸 것이라는 얘기가 있다. 이 옷이 훗날 재봉 방식의 변화에 따라 '''인민복'''과 '''국민복'''으로 나뉘게 된다. [[파일:attachment/love_&_war.jpg]] 제2차 [[국공내전]] 직전 협상 과정에서 찍은 [[마오쩌둥]]과 [[장제스]]. 두 사람이 입은 옷을 보면 둘의 차이를 확실히 알 수 있는데, 상의 앞 주머니를 드러나지 않게 안쪽으로 재봉하면 인민복, 드러나게 재봉하면 국민복이 된다. 꽤나 [[미남]]인데다 명망도 있어서인지, 여자 관계가 상당히 복잡했다. 첫 아내는 19세에 결혼한 루무전(盧慕貞)으로 쑨원은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 [[쑨커]][* 훗날 [[중화민국]]의 고위직]와 딸 쑨얀, 쑨완을 두었다. 쑨원이 결혼하거나 첩으로 두었던 다른 여인들은 전부 신식 교육을 받거나 혁명 투쟁을 같이 한 여성들이었으나 루무전은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전족]]을 한 전통적인 중국 여인이었기에 쑨원의 정치적 동지도 될 수 없었다. 둘은 1915년 9월에 [[이혼]]했다. 이후 남편과는 전혀 왕래가 없었으며, 루씨는 마카오에서 여생을 마쳤다. 1915년 결혼한 두 번째 아내인 [[쑹칭링]]은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사상적 동지였던 [[쑹자수]]의 딸이었으며 쑨원의 비서였다. 쑹자수는 '''찰리 송'''이라는 미국식 이름이 유명하다. 중국어판 [[성경]]을 팔아서 떼돈을 번 후, '''정치 활동 = 혁명 사업'''에 투신했다. 즉, 쑨원과 쑹칭링의 아버지는 친구 사이. 고로 그와 그녀의 사이는 부녀뻘로 나이차는 무려 '''26세''' 차이. 이 때문인지 현재 [[타이완]]에서는 "쑨원이 진성 '''[[로리콘]]'''이 아니었는가?"하는 평가도 있고, 그의 [[http://www.weicomic.com/100roc/100roc.htm|패러디 동인지]]도 있다. 사실 쑹칭링의 아버지는 해당 결혼을 결사 반대했으나, 쑹칭링은 가출까지 하면서 결혼을 강행했고 대노한 쑹자수와 쑨원은 멀어지게 된다. 근데 저 둘 외에도 일본 망명 중에 결혼한, 22세 차이나는 일본인 아내 오오츠키 카오루(大月薰) ^^(1888년 ~ 1970년)^^가 있었다. 1903년 결혼 후 1906년 아이를 낳은 그 해에 쑨원은 제대로 된 관계 정리 없이 떠나버렸다. 생몰년도를 보면 알겠지만 15세 소녀와 결혼해 18세 때 임신시키고 사실상 버렸다. 전근대 사회에서의 조혼 풍습을 고려해도 [[근대화]]가 진행 중이던 [[20세기]]에 이런 식으로 끝나버린 이성 관계를 정상적으로 여기기는 어렵다. '''쑨원의 [[흑역사]]나 다름없는 부분.''' 둘 사이에 딸인 미야가와 후미코 ^^(1906년 ~ 1990년)^^가 있으며 그의 손자는 2020년까지 일본에서 살다가 사망했다. 그 외 상단 표에 보이듯 [[첩]]이 둘 더 있었다. 물론 당시 시대상은 감안해야겠지만 그래도 많긴 하다. 특히 첩 중 한 명인 천추이펀은 말이 첩이지 사실상 20년 넘게 쑨원과 살았던 실질적 본처격으로, 단순히 쑨원의 여인이기만 한 게 아니라 혁명군을 위해 밥이나 빨래를 해주는 등 착실한 뒷바라지를 해주던 혁명 동지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쑨원의 동지들도 조강지처인 루무전은 물론이요, 사실상 본부인이나 다름없던 천추이펀을 안타까워하며 쑨원과 쑹칭링의 결혼식에 가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8827006#home|#]] [[하와이]]에 유학하면서 [[기독교]] 사상을 접하게 된 뒤 독실한 개신교 신자가 되었는데 위에서 말했듯 고향에 돌아오자마자 [[우상숭배]]를 타파한다는 이유로 고향 후배인 육호동과 함께 세 개의 신상을 부숴버렸을 정도로 믿음이 신실했다. 그는 자신을 혁명으로 이끈 동기가 출애굽을 이끈 모세 일화와 전 인류를 죄에서 해방시킨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기원한다 밝혔으며 사람들이 자신의 혁명적 성과만 보고 그 동기를 바라보지 못하자 아래와 같은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 >'''혁명은 불이고, 기독교는 기름이다. 사람들은 나의 혁명만 보고, 나의 신앙을 보지 못한다. 기름이 없으면 어떻게 불이 일어나겠는가?''' [[소련]]의 [[블라디미르 레닌]]은 이 사람을 '''"흉내 낼 수 없을 정도의 [[처녀]]다운 순진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실제 둘의 행보는 조금 다르다. 레닌은 [[러시아 혁명]] 이전부터 게오르기 플레하노프, [[표트르 크로포트킨]] 같은 전 세대 러시아 혁명 원로들에겐 비정하고 냉혹한 정치 방식으로 비판받고 혹자에겐 그런 [[마키아벨리]]적 결단력이 성공의 비결이었다고 평가받기도 했다.[* 다만 레닌도 진짜 [[마구잡이]]로 [[숙청]]하고 죽이던 [[스탈린]]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반면 쑨원은 위대한 사상가적 입지와 카리스마와는 별개로 마키아밸리적 관점에선 현실 정치가로서 상당히 미숙하고 어설픈 부분도 많았다. 그래서인지 장기적으로 남긴 역사적 영향력과는 별개로, 살아생전 쑨원은 명망과 입지에 비해 부족한 실권 때문에 항상 중요한 부분에서 실패가 많았다. 물론 이건 그가 원래부터 실권이 부족했기 때문으로, 딱히 [[마키아벨리]]적 결단을 했냐 안 했냐가 핵심적인 사안은 아니었다. 어쨌든 쑨원 본인도 시인했듯 당시 [[국민혁명]]은 반쪽짜리 성공으로 남아버렸다. 다만 레닌의 [[소련]]이 망해버린 지금에 와선 쑨원이 최후의 승자 비슷하게 되긴 했다. 좀 냉소적인 관점에서 보면, 당시 쑨원은 이상을 떠들었지만 현실은 중국 내 군벌이나 국민당 내 기회주의자, 야심가 혹은 일본, 서양, 소련, 나중엔 공산당 같은 속이 시커먼 세력들에게 "암, 그 분 위대한 분이지."라는 식으로 립서비스만 실컷 받고 막상 자기들 야망 채울 용도로 이용당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일본은 훗날 [[중일전쟁]] 당시 [[일본 제국|일제]]가 설치한 [[괴뢰국|괴뢰정부]]도 어쨌든 이름은 [[중화민국 임시정부(괴뢰정부)]]였다는 점이 보여주듯, [[제국주의]]적 야욕과는 별개로 일본에서 쑨원에 대한 평가 자체는 민관 양쪽에서 으레 높았다. 오히려 일본 극우파들이 쑨원이 일본 유학 중 받은 영향을 엄청나게 과장하며 그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해 보인 경계심은 애써 무시하고, 일차원적이고 무비판적인 일뽕이었던양 왜곡하려고 들 정도였다. 물론 현실적으론 한쪽이 일방적으로 이용당하는건 없고, 당대 쑨원은 자기에게 부족하던 실권을 상대측은 쑨원의 명망을 보고 서로 이용했고, 이후 쑨원의 명분론적 입장이 밑 세대로 갈수록 지지를 받아 오늘에 이르러선 진짜 존경심으로 우러났다고 보는게 좀 더 정확할 것이다. 또 이런 냉소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어쨌든 상기한 서로 이해관계나 목적이 확연하게 다른 여러 세력 중 [[장훈복벽|청 황실 복벽주의자]] 같은 소수만 빼곤 전부 표면적으로나마 쑨원을 긍정적으로 또는 더 나아가 극찬했고, 결국 오늘날 와서는 서로 대립하던 국민당, 공산당 양쪽에서 모두 인정하는 중화권의 통합적 상징 위인으로 거듭났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업적이다. [[문화대혁명]] 시절, 쑨원이 광둥 정부 시절 거주한 광저우의 사저와 난징의 중산릉 역시 [[홍위병]]들에게 파괴당할 뻔 했는데, 당시 관리인이 [[마오쩌둥]]이 쑨원을 찬양한 시를 읊어주면서 "마오 주석이 가장 존경하는 분의 사저를 박살낸다고?"라는 식으로 대들자 --띨띨한-- [[홍위병]]들이 물러갔다고 한다.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대만)의 도로에도 보면 중산이라는 이름을 붙인 도로가 있는데, 시내도로 이름이 중산로(中山路)라든가 중산대도(中山大道)라는 식으로 되어있다. 대만의 경우에는 고속도로 이름까지 중산이라고 되어있는데, [[중산고속공로]]가 그렇다. [[중일전쟁]] 당시 중화민국 해군이 운용한 [[건보트]] [[중산함]]과 중화민국이 건조한 자국함인 [[경순양함]] [[이셴]](얏센)은 쑨원의 호를 붙인 함선들이었는데, 이셴은 [[장인 전투]]에서 좌초 당해 일본군에게 노획되어 아타다라는 이름으로 개명당한 채로 일본군 해군에 편재되어 연습함으로 운용되었고 중산은 우한 전투에서 격침당했다. 다행히 이셴은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아 대만으로 반환되었고, 중산은 격침당한지 59년 뒤에 인양되어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대한민국의 배우 [[김종결]]의 외모가 쑨원과 닮았다. 대만에서 발간한 쑨원의 말을 모아둔 국부전집에 따르면, 쑨원은 "주변국은 중국에 조공할 수 있는 것을 영광으로 그렇지 못 한 것을 치욕으로 안다.", "[[태국]]은 중국의 한 성이 되고 싶어 한다.", "조선과 베트남도 중국에 가입하게 해야 한다."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그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장제스]]는 [[몽골]]을 되찾아야 할 땅으로 인식해 중화민국은 2012년 몽골의 독립을 승인하기 전까지 실제 몽골을 자국 영토로 인식했다. 또한 한국의 독립을 도우며 한편으로는 독립될 한국을 국민당의 영향력 아래에 두려고 계획했다. [[조소앙]]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장제스가 사상 및 영향력을 과하게 주입하고 있다."고 미국에 불평을 할 정도였다. 그런데 장제스는 [[파시스트]]로 분류되는 인물이다. 쑨원과 동일한 사상을 가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근데 국내에선 이를 가지고 쑨원이 한국, 베트남, 몽골 등 과거 중국과 조공 관계였던 나라를 중국의 속국 비슷하게 인식한 비뚤어진 [[중화사상]]을 가진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비난은 딱히 합리적이지가 않다. 쑨원은 반(反) 제국주의를 주창한 정치가로, "중국의 위상이 회복되면 제국주의의 피해를 입고 있는 다른 약소국을 도와야 한다.", "여러 민족들이 서로 평등한 관계에서 협력하는 공화국을 건설해야 한다." 등의 발언을 했기에 절대로 패권주의를 옹호한다고는 할 수 없다. 애초에 중화민국이 초기에 내세웠던 이념인 [[오족공화]]에는 조선인, 베트남인 등은 포함 자체가 되지를 않았다. 이게 세월에 따른 사상적 흐름의 변화인지,[* 애초에 쑨원은 생애의 대부분을 추하게 몰락 중이던 이민족들의 정복 왕조 [[청나라]]에서 보냈다. 당시 [[조선]]도 마찬가지였으나, 중국도 외국 열강들에게 온갖 공격을 받던 시기였다. 쑨원이 민족주의를 내세웠다고는 해도 이는 외국의 침략에 맞서는, 이른 바 저항적인 민족해방에 가까운 것이었다.] 아니면 그저 발언의 앞뒤를 자른 왜곡인지는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나, 그와 별개로 쑨원 그에 걸맞는 의무를 중국이 짊어질 것을 강조했다.[* 사실 흔히 착각하는 것과 달리 전통적 중화사상은 주변 약소국이 중국을 상국으로 모시면 중국도 그 국가들에게 물질적으로 보상을 해줄 것을 강조했으며, 결코 국수주의로 점철된 이기적인 사상이 아니었다. 쑨원도 전통적 중화사상에 아시아주의적 가치를 더하여 계승했던 것이다. 국내에선 중국 내셔널리즘이나 한족 민족주의를 부정하기 위해 이들을 그저 전근대부터 통용된 중화사상 하나로만 결부시키고, 나아가 동의어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는데, 현대의 중국 내셔널리즘은 원래 중화사상의 동의어가 아니라 별개의 개념이다.] 중공 당국에서 추진 중인 [[남수북조]] 사업을 제안하였다.[* 이는 계획으로만 끝났고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뒤인 1953년에 [[마오쩌둥]]이 구상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