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싸전빙 (문단 편집) === 청 해군의 거목 === 1894년 부장으로 승진하여 북양해군 좌영을 맡았으며 [[청일전쟁]] 시기 연습함 강제호의 함장으로 참여했다. 일본군이 산둥반도까지 몰려오자 정여창 제독의 명령에 따라 일본군에게 물자를 넘겨주지 않기 위한 파괴공작을 수행했다. 전후 유능한 해군지도자로 평가받았다. 이는 청일전쟁 후 북양수사의 사실상 유일한 전력이었다. 1896년 오송포대의 책임자로 임명되었으며 자강군 통령, 통제함 관대를 거쳐 1899년 4월 17일 제독으로 승진, 북양함대 부통령에 임명되어 광서제 시기의 해군 재건을 진두지휘하였고 1902년 총병으로 승진, 광동함대를 맡았으며 1903년 북양수사 통령으로 옮겼다. 1905년, 북양수사 총병 엽조규가 병으로 은퇴하자 그의 뒤를 이어 북양수사 제독으로 승진했다. 1905년 남양수사제독에 임명되었으며 주복이 양강총독에 임명되자 그와 함께 남양수사의 구식 함선들이 낡고 쓸모없다는 이유로 이를 대대적으로 퇴역시키고 남은 예산으로 북양수사 재건에 나섰다. 1907년 요석광이 순양함대의 편성, 해군기지와 해군교육시설의 확충, 해군학생의 해외유학, 향후 12년간 1억 2천냥을 투입하여 일등전열함 2척, 이등전열함 2척, 삼등전열함 2척, 일등장갑순양함 4척, 이등장갑순양함 3척, 삼등장갑순양함 1척, 어뢰정 16척 구매를 통해 대함대를 건설할 것을 제안하자 이 계획이 요점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1907년 3월, 엽조규의 해군학교 건설 정책을 계승하여 연태해군학교를 신설하여 해군 인재를 양성했다. 1909년 2월 [[선통제]] 즉위 후 섭정왕 [[재풍]]의 눈에 들어 해군사무대신 겸 해군제독에 임명되었다. 살진빙은 [[정벽광]]을 순양함대 통령, 심수곤을 장강함대 통령으로 임명하고 주판해군사무처를 조직하여 전국의 함대를 중앙정부에 귀속시켰다. 1909년 8월, 재순과 함께 해군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일본으로 순시를 떠났으며 1909년 10월, 서양해군을 관찰하기 위해 유럽 외유를 떠나 이탈리아에서 400톤급 구축함 경파,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400톤급 구축함 용단, 독일에서 신식구축함 3척과 포선 2척, 영국에서 2757톤급 순양섬 2척을 구매하였다. 1910년 8월에는 미국 해군 시창레 나서 미국제 순양선 비홍의 도입 계약을 체결하였다. 1911년 3월 해군부 부통령에 임명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