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십팔자위왕 (문단 편집) == 개요 == {{{+1 [[十]][[八]][[子]][[爲]][[王]]}}} [[고려시대]]에 떠돌던 도참설에 기반한 [[소문]]. 십팔자득국([[十]][[八]][[子]][[得]][[國]]), 목자득국(木子得國)도 같은 의미로 [[이자겸의 난]]과 관련되어 처음 언급된다. 그 내용은 '십팔자' 이름을 가진 사람은 [[왕]]이 된다는 뜻으로, [[파자|十八子(십팔자)를 합치면]] 李(이)라는 한자가 되니 결국 이씨 가문에서 왕이 나온다는 이야기였다. [[이자겸]]은 왕의 외조부이자 장인이라는 유례없는 외척인데다가 조정의 주요 관직도 다 차지하고 강력한 무신인 척준경까지 수하로 두면서 왕권을 훨씬 능가하는 역대급 권신으로 군림했다.[* 한국사에서 이자겸과 비견될만한 권신은 국왕 이상의 실권을 가지고 권력을 자식에게 세습했던 [[연개소문]]과 [[최충헌]] 밖에 없다.] 당시의 사람들은 이자겸의 권세를 보고 그가 곧 왕위찬탈까지 할거라 의심해서 만든 소문이거나 또는 이자겸 본인이 찬탈을 저지르기 위해 사전작업으로 일부러 퍼트린 소문이란 설도 있다. 혹은 이자겸은 찬탈 의사가 없었으며, 당시에 그런 소문도 없었음에도 친위쿠데타에 성공한 인종이 "이자겸이 이씨가 왕이 될거라는 도참을 믿고 찬탈을 시도하자 내가 그를 몰아낸 것이다"라고 명분을 위해 만들어낸 기록이라는 등 정확한 기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추측이 있지만 이자겸의 권세가 워낙 강했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난 소문이라는 부분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고려 중기 무신정변 주동자였던 [[이의방]][* 이자겸과 성씨는 같으나 본관이 달랐다.]에게 [[이린(고려)|이린]]이란 동생이 있었는데, 훗날 이린의 후손인 [[이성계]]가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건국하면서 예언이 생긴 지 수백년 이후에 십팔자위왕이 실현되었다. 목자득국은 李를 木+子로 좀 덜 쪼갠 것인데, 이건 [[오행설]]과도 관련이 있다. 본래 동양에선 모든 왕조는 그 왕조에 부여된 오행의 순환관계에 따라 건국되고 망함을 반복한다는 오덕종시설(五德終始說)이 있었다. 즉 오행의 상성 관계에 따라 [[나무]](木) → [[불]](火) → [[흙]](土) → [[쇠]](金) → [[물]](水) → 나무 순서. 옆나라 중국에서도 오행은 왕조 교체의 명분으로 흔히 언급되고 있었고[* 유명한 사례로 [[삼국지]]에서 화덕을 내세웠던 [[후한]] 왕조를 무너뜨리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황건적]]의 슬로건 '창천이사 황천당립(蒼天已死 黃天當立)이다. 화생토의 원리로 화덕 다음은 토덕에 의한 나라가 들어선다는 원리이다. 비록 황건적은 실패했지만 이것은 [[헌제]]의 선양을 받은 [[조위]]에도 이어졌는데, [[조비]]가 위를 세운 뒤 개원한 '황초(黃初)도 오행설에서 비롯된 것이다. 반면 후한이 [[촉한]]으로 계속 이어짐을 내세운 촉한은 염흥(炎興) 같이 화덕에 기반한 연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훗날 [[후금]]을 건국한 [[만주족]]도 화덕을 표방하는 [[명나라]]를 제압하겠다는 의지로 국호를 수덕을 표방한 [[청나라]]로 바꾸자 정말로 명을 정복하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신라]]는 김(金)씨 왕조였고 수도가 [[금성(동음이의어)|금성]]인 것처럼 금덕(金德)의 나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그 [[통일신라]]를 교체하고 들어선 왕조 [[고려]]는 수덕의 왕조를 스스로 표방했다.[* 궁예는 신라를 대체한다는 의미로 수덕만세(水德萬歲)라는 연호를 사용했고, 이후 왕건은 궁예가 세운 나라의 원래 이름이었던 고려를 그대로 이어받아 계속해서 수덕을 표방했으며, [[훈요 10조]]에서 서경을 중시하라고 한 것도 평양이 수덕이 순조로운 땅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즉 고려 다음 왕조는 당연히 목(木)덕이어야 했으므로 나무 목 자가 나오도록 끼워맞춘 것이다. 대중들에게는 [[이성계]]가 가장 유명하지만, 그 이전부터 [[이자겸]], [[이고]], [[이의방]], [[이의민]] 등 이씨 권신들이 등장했다. 이자겸과 이의민은 이 도참설에 기대어 왕위찬탈을 노렸으나 실패했다. 당시 고려의 왕들은 이런 소문을 차단하기 위해 오얏나무(李)를 대량 벌채하는 등 기를 꺾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성계의 [[조선]] 건국으로 소문은 맞아 떨어지게 된다. 어찌보면 [[왕건]]에게도 해당이 되는데 왕건의 집안이 [[당숙종]]의 후손이라고 사칭을 했었던게 만약 사실이라면 왕씨라는 성씨를 쓰기 이전에 이(李)씨 성을 썼을 수도 있다.[* 물론 왕건의 집안이 당나라 황실의 후손이란건 고려 건국하고도 한참 이후에 만들어진 정통성 강화 작업이라는 분석이 정설이기 때문에 실제로 이씨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