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심형래/생애 (문단 편집) === 영화배우 겸업 === 이렇게 개그계를 섭렵한 심형래는 1984년, "각설이 품바 타령"을 시작으로 영화 배우도 겸업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 때는 [[김형곤]]이나 [[이주일]] 같은 동료 코미디언들도 이렇게 원맨쇼에 의존하던 영화를 찍던 시절이었다. 이런 원맨쇼 영화 중에서 김형곤이 주연한 대표작들은 "여자는 괴로워"와 동명의 코메디 코너의 극장판인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이 있고, 이주일이 주연한 영화들은 "[[이주일의 리빠똥 사장]]",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등이 있다. 심형래는 [[김청기]] 감독과 함께 한 한국 어린이 영화에 한 획을 그은 SF물 "[[우뢰매]]"의 에스퍼맨 역으로 영화배우로서도 성공을 거두기 시작하였다. 우뢰매는 실사와 애니메이션이 합성된 [[특촬물]]로서 그때부터 SF 쪽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우뢰매 시리즈는 꽤 성공을 거두어 총 9편이 나왔는데 관중 동원력이 탁월했던 그가 등장하지 않은 6편은 관중수가 크게 줄어 이후 시리즈에서 다시 복귀하기도 했다. 사실 심형래가 안 나올 거 같았으면 심형래와 대등한 [[인지도]]의 배우를 캐스팅했어야 했지만, 우뢰매 6에서 심형래 대신 캐스팅했던 배우라는 게 당시에는 [[듣보잡]]이었던 [[한정호#s-2|한정호]]였다. 굳이 심형래를 쓰지 않아야 했더라면 [[김정식(코미디언)|김정식]]이나 [[이창훈(코미디언)|이창훈]] 같은 심형래급의 [[네임드]]를 썼어야 했다. 우뢰매를 떠난 그는 [[남기남]] 감독과 함께 "[[영구와 땡칠이]]", "[[영구람보]]"를 비롯한 [[영구와 땡칠이 시리즈]]로 많은 어린이들의 호응을 얻었다. 그 외에도 남기남 감독과 '따귀 일곱대' 등 어린이 영화 외적인 장르에서도 열연을 했고, 또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슈퍼 홍길동]]이라는 [[사극]]성 코미디 영화도 찍었다. 홍길동 시리즈는 7편까지 나온 나름 비디오물 중에서는 준수한 작품인데, 심형래는 1편만 찍었다. 사실 1편은 [[이경규]], [[조춘(배우)|조춘]], [[국정환]] 등 출연진이 의외로 빵빵한 작품. 2편 이후부터는 김정식이 심형래에게 바톤을 넘겨받았다. "우뢰매"가 200만 관객이라는 얘기와 "영구와 땡칠이"의 관객 동원이 흥행 1위 등의 이야기들도 있으며, 심형래는 영화계에서 본인 영화를 제대로 평가해주지 않는다고 원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영화 잡지들만 봐도 이런 양산형 어린이 영화는 영화 취급을 안 했음을 알 수 있다. 로드쇼는 1990년 1월호를 비롯하여 아예 영구와 땡칠이를 흥행 순위에 넣지도 않았지만, 스크린은 1990년 1월호에서 영구와 땡칠이가 서울관객 43만으로 로드쇼에서 1위로 선정한 [[서울무지개]]의 30만을 제치고 [[한국 영화]] 흥행 1위라고 보도한 바 있다. 그러나 1980~90년대 시대는 지금처럼 전산망 집계 자체가 불가능했던 시대였기 때문에 관중 집계는 주먹구구식이었고, 그나마도 서울 지역에서만 제대로 집계되었지 지방 쪽은 집계가 제대로 이루워지지 않아 추정치가 차이가 심하다. 이것은 [[높으신 분]]이나 영화계를 흔드는 [[조폭]]들의 세금 포탈로 악용되기도 했다. 다시 말해 오늘날 와서는 이때의 이야기를 명확히 검증할 방법이 없다는 얘기. 단지 실시간으로 당시 상황을 체험했던 사람이라면 매 상영 때마다 극장이 터져나가라 자리를 채우던 꼬마 관객들의 모습이 기억날 거다. 게다가 당시 영구와 땡칠이를 비롯한 소위 [[어린이 영화]]는 일반 영화관이 아닌 [[어린이회관(서울)|어린이회관]] 같은 공공기관 위주로 상영을 했는데, 이는 어린이 영화라는 공공성을 생각해서 극장보다 문턱이 훨씬 낮고 대관료도 상당히 싸서 전략적으로 접근을 한 것이지 상영할 곳이 없어서 부득이하게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어린이 영화들과는 레벨 자체가 다른 영화 [[하얀전쟁]]이나 [[돌로레스 클레이본]]도 시사회나 상영은 호암 아트홀에서 했다. 역시 전략적인 접근이다. 그렇다고 일반 영화관에서 상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회관으로 돌면서 상영하면 더욱 실제 관객수를 집계하기 어렵고 다른 '''상업 영화'''와 같은 라인에서 비교하기 어려워지는 것도 당연하다. 어쨌든 [[영구와 땡칠이]]가 흥행해서 당시로써는 엄청난 수입을 올린 건 사실이다. 당시 이 영화를 지원했던 '[[대원미디어|대원]]'이 이 영화의 덕에 파산 직전에서 기사회생해서 대원 사장인 [[정욱]]은 지금도 심형래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있고, 감독인 [[남기남]]도 어느 호러영화 사이트와 인터뷰에서 "내 영화 인생에서 영구와 땡칠이만큼 돈 많이 번 적이 없어."라고 말할 정도로 고마워하고 있다. 이렇게 심형래의 출연작은 20여편이나 된다. 이 정도면 중견 영화 배우로 봐 줘도 무방하다. 지금도 30~40대의 추억의 영화로 심형래가 주연한 [[영화]]가 왠만하면 꼭 들어가며, [[주인공]]이 영구가 아닌 작품도 무수히 많이 찍었다. 딱 한 번 코메디가 아닌 정극을 찍은 적도 있었는데, 그것이 1994년에 개봉된 '핑크빛 깡통'이었다. 여기서 심형래는 거지로 나오는데, 심형래 답지 않게 코메디 따위 일절 안 나오는 영화였다. [[박수칠 때 떠나라|이제는 지나간 얘기지만, 이 상태에서 느긋하게 여유를 즐기거나 은퇴하고 조용히 살았어도 문제는 없었다]]. 전성기의 심형래는 인기와 위상이 하늘을 찔렀다. '''[[김연아]]급의 인기를 누렸던 연하의 아시안 게임 금메달 리스트와 사귀었다'''는 부분만 봐도 답이 나온다. 1980년대 후반 몇 년 간 [[연예인]] 소득 종합 '''1위'''를 할 정도로 엄청난 수입을 올렸고, 재테크에도 힘썼다. 실제로 심형래 본인은 '''"강남에 빌딩이 몇 채나 되고 수도권에 알짜배기 땅이 몇 군데나 되었다."'''고 얘기했다. 또한 1980년대 말 ~ 1990년대 후반까지, 강남에 대규모 유흥업소를 여러 개 운영했다. 다만 본인은 유흥업소 운영은 창피하게 보는지 [[자서전]]에는 쓰지 않았다. 그냥 큰 사고 안 치고, [[도박]]만 멀리하고, 여러 [[토크쇼]]에 계속 나오거나, 고정 프로그램 몇몇을 잡거나, 연기 학원을 차려서 후학 양성에 힘을 써도 괜찮았다. 하물며 별다른 일 안 하고 가끔 방송에 얼굴만 비춰도 심형래는 평생을 먹고 살 수 있었다. '개그맨 심형래'에게는 평생 대접 받으면서 적당히 본업에 열중하고 여유롭게 여가시간을 보내며 살아갈 기회가 넘쳐 흐를 정도로 참 많았다.[* 90년대 후반 [[이소라의 프로포즈]]에 심형래가 홍보차 출연한 적이 있는데, 만만찮은 성격으로 유명하고 립싱크라는 이유로 [[이소라(가수)|이소라]]의 프로포즈에 [[컨츄리꼬꼬]]나 [[god(아이돌)|god]]가 나오면 대놓고 방송 펑크를 내던 이소라였다. 그 후신격의 프로그램에서는 비가수 연예인들도 종종 나왔지만, 이소라의 프로포즈에서는 가수가 아닌 사람은 거의 안 나왔다. 그런데 [[코미디언]] 출신의 심형래가 나왔을 때는 만면에 웃음이 넘쳐 흐르고 동경하던 [[톱스타#s-1|톱스타]]를 대하는 듯한 올바른 태도로 잔뜩 덕담을 교환했다. 이것은 69년 생인 이소라에게 심형래가 어떤 위상을 가진 연예인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방송이었다고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