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심형래/생애 (문단 편집) === 지상파 개그맨 - 전설 중의 전설 === || [youtube(HSFoY8somsI)] || || [[유머1번지]] 시절 '영구야 영구야' 코너 (1988년) || > 정말 천재적이에요. 옛날에 뭐 그렇게 파리 나와가지고 하는거 그 관찰력이라는게 내가 보고 정말 저분은 천재적인 바보다… >---- >[[진중권]][* 방송에서 디워에 대한 평론이 화두에 오르자 한 말이다. 심형래가 개그맨으로서의 자부심이 없어 다른 영역으로 진출하려 하는 것 같다며 [[기타노 다케시]]같은 개그맨 출신 영화감독도 있지만 심형래는 그런 재능은 없다고 비평했다.] [[1982년]] [[KBS]] 제 1회 개그 콘테스트 동상을 수상하며 연예계에 데뷔하였다. 데뷔한지 1년만인 [[1983년]], 심형래는 유머 극장의 꼭지 중 하나인 <[[임하룡|하룡]] 서당>에서 바보 제자 캐릭터로 출연, "난 잘 몰르겠는데요" 라는 유행어로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얻는다.[[http://www.newstow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45544|#]] 이듬해인 [[1984년]]에는 <심형래 코믹 캐롤>을 발매하여 대히트를 기록하면서 개그 캐롤을 유행시키기도 하였다. 1980년대 중반부터 후반이 리즈시절이었는데 대히트를 친 개그 캐릭터로는 토요일 저녁마다 하던 [[유머 1번지]]의 [[영구(심형래)|영구]], 변방의 북소리, 내일은 챔피언 등이 있고, 일요일 저녁에 방영되던 [[쇼 비디오 쟈키]]의 파리, 펭귄이 있다. 이 중에서 영구는 여로의 영구를 재해석했는데 그야말로 대히트를 쳐서 원래의 영구를 아예 파묻히게 만들었지만,[* 1970년대 당대의 방송자료가 별로 남아있지 않기도 하다. 그래서 방송사에서 여로를 틀어주려고 해도 5분짜리 클립영상이나 영화판 여로만 틀어줄 수밖에 없는 수준이 되어버린 것.] 파리와 펭귄은 일본 민방의 개그 프로에서 가져온 '''표절 캐릭터'''였다. 하지만 뻔뻔하게도 심형래는 최근 한 방송에서 이 캐릭터를 [[펭수]]의 원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펭귄의 이름은 펭귄+영구를 합쳐 펭구라 했기 때문에 모티브 정도라면 틀린 얘기가 아니긴 하다. 그리고 사실 이걸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좀 이상하고 그냥 엉뚱한 소리를 해서 웃기려는 개그맨들의 흔한 레퍼토리 중 하나에 불과하다.] 다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방송계에서 일본 TV프로그램을 베껴먹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들켜서 욕을 먹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음에도[* 사실 들키고 뭐고 할 것도 없이 일본TV 전파가 잡히던 부산 살면 어떤 프로그램을 베껴먹었는지 대강은 알 수 있었고, 일본어를 어느 정도 수준으로 하면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을 표절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관행이 1960년대 중반부터 약 30여년간 지속되어온지라, 딱히 심형래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게다가 당시 우리나라는 [[베른 협약]] 같은 저작권협약에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법적으로 위반도 아니었다. 전성기에는 코미디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위치에 있었다. '''"바보 연기"'''[* 의외로 연기하기 쉽지 않은 분야라고 한다. 느릿~ 느릿한 행동, 팔랑귀, 세월아~ 네월아 판단 늦은 모습을, 순발력 좋은 연예인들이 의외로 포착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영화 [[라스트 갓파더]] 개봉 즈음 [[유재석]]이 본인 진행하는 프로그램에서 심형래와 함께 바보 연기에 도전했는데, 여기서도 바보를 연기해야 할 사람이 재빠른 상황 대처능력을 보이는 바람에 여러 차례 실패하는 장면이 나온다.]와 [[몸개그]]에 능했던 심형래는 1980년대 중후반 방송계에서 코미디의 황제 [[이주일]]의 뒤를 이어 최고의 개그맨으로 인정받으며 무수한 작품들을 남겼다. 특히, 그가 창조한 '''[[영구(심형래)|영구]]'''라는 캐릭터가 유명하다. 심형래라는 이름보다 그의 닉네임인 '영구로 기억하는 사람이 더 많을 정도. 아직까지도 심형래보다 몸개그를 잘한다는 평이 난 개그맨은 나오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능력이 입증된다. 심형래는 동료 개그맨들 속에 섞여있어도 언제나 분장이나 의상 면에서 더 웃기고 더 튀었다. 게다가 심형래와 같이 분하는 배우들이 일명 '심형래 바보 만들기' 식의 개그를 하면서 그의 캐릭터성은 더욱 부각되었다. 주로 __'문이 열려있다.→심형래에게 문을 닫으라고 한다.→심형래가 문을 닫고 오면 문이 자동으로 다시 열린다.→심형래에게 핀잔을 준다.'__ 식이나 무언가를 하면 항상 심형래만 고생시키는 이러한 패턴은 상당히 잘 먹혀서 순식간에 그를 스타덤에 올려주었다. [[개그 콘서트]]에서 [[황현희]]나 [[변기수]]가 보여준 '정상인 바보 만들기' 개그와는 정 반대인 셈이다. 심형래의 코미디 스타일을 외국 코미디언과 굳이 비교한다면 [[시무라 켄]]으로 대표되는 일본식 몸개그에 가깝다. 한국의 [[찰리 채플린]] 정도의 위상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당시 그가 한국의 찰리 채플린으로 불린 적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채플린의 무성영화적 몸개그는 사실 심형래의 그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더욱이 채플린 영화는 군사독재정권이 그의 반독재적이고 사회주의적 성향을 문제 삼아 수입을 금지했고 1989년에서야 수입되었다. 다만, 채플린에 대한 언급이나 채플린 코스프레는 많은 연기자들이 했었다. 1970년대 이상한/이상해 콤비가 채플린형 [[몸개그]]로 인기를 끌었다. 여담으로 코미디 스타일이 [[새터민]]에게도 먹히는 모양이다. 새터민들이 한국에 와서 접하는 [[개그콘서트]] 같은 것은 이해도 어렵고 웃음 코드도 다른데 1980년대 심형래 코미디는 그렇게 재미있다고. [[http://blog.donga.com/nambukstory/|서울에서 쓰는 평양 이야기]] 블로그로 유명한 새터민 [[주성하]] 기자는 북한 주민들의 문화적 코드가 한국의 30~40년 전과 거의 같기 때문이라고 진단한 바 있다. [[http://blog.donga.com/nambukstory/archives/16934|"북한 주민이 개그 콘서트 보면 웃길까?"]] 사실 심형래가 좋은 역할을 매번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인기 개그맨 및 고참이라는 이유로 항상 자기가 가장 주목받는 역을 가져가거나 다른 개그맨들의 아이디어를 강탈했기 때문이다. 단, 컬트삼총사가 [[컬투]]가 된 걸 봐도 알 수 있듯 아이디어를 잘 낸다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연기로 잘 살린다는 법칙은 없다. 코미디계 원조 아이디어 뱅크로 유명한 [[전유성]]이나 현재 [[코미디빅리그]]에서 아이디어 뱅크 역할과 받쳐주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최성민(코미디언)|최성민]] 같은 인물들을 보면 아이디어를 내는 것과 그걸 관객들에게 잘 전달하는 건 별개의 재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것 하나만으로는 심형래의 인격이 크게 못나다고는 할 수 없다.''' 사실 심형래가 가장 주목받는 역을 가져간다고 뭐라고 할 수도 없는 게 최고의 스트라이커가 골을 독식하려고 하는 것은 당연하듯이 가장 웃긴 사람이 가장 주목받고 웃기는 역할을 맡는 것도 당연지사이다. 이른바 아이디어를 잘 짜는 사람 vs 아이디어를 내지 못하지만 무대에서 잘 살리는 사람의 대립은 개그계에서 사라지지 않는 논란거리다. 즉, 개그계 전체의 문제이지 심형래 한 사람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당시 대한민국의 개그계는 타 방송국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나왔다는 이유로 [[감자골]] 4인방이 KBS에서 거의 매장되다시피 했을 정도로 방송사 전속 출연의 개념이 굉장히 강했던지라 자신들이 소속되어 있는 방송국에서 방영하는 코미디 프로그램에만 출연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활동할 수 있는 무대 자체기 매우 적었다.''' 덕분에 당시 개그맨들은 한정된 이권을 놓고 벌이는 아귀다툼이 상당한 편이었다. 즉, 여기서 벗어난 개그맨들이 대단한 것이지 심형래는 당시 개그맨 중에서 평범한 케이스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1991년]] [[SBS]] 개국 때 상당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SBS로 이적했다. 위에서 적었다시피 개그맨들은 방송국 전속 출연의 개념이 심할 때라서 화제가 되었다.[* 당시 SBS는 심형래, [[최양락]], [[김미화]], [[이봉원]], [[정재환]], [[박미선]]같은 타 방송사 개그맨들을 여럿 섭외하고 [[신동엽]], [[표인봉]], [[전창걸]] 등 재능이 보이는 사람들을 특채로 뽑는 등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이들로는 안 된다고 판단하여 1992년 3월 제 1기 공채 개그맨([[김경민]], [[윤정수]], [[김경식]], [[정선희]] 등)을 새로 뽑았고 [[청춘행진곡]] 폐지로 설 자리를 잃었던 MBC 출신의 [[김창준(코미디언)|김창준]], 김은태, [[이현주]], [[이웅호]]를 영입했다. 그러나 SBS로 이적한 타 방송 출신 원로 개그맨들은 거의 대부분이 [[토사구팽]] 되었다. 특히 MBC에서 이적한 사람들이 대부분 피해자가 되었는데 개국 때 이적한 정재환은 MBC 시절 잘 하지도 않던 콩트 코미디에만 집중 투입되다 보니 KBS 출신의 최양락과 이봉원, SBS가 직접 키운 신동엽, [[김경식]], [[홍록기]] 등에게 밀려 용도폐기되었고 '청춘행진곡' 폐지 뒤 방송사를 옮긴 김은태는 비슷한 유형(작은 키)의 [[윤정수]], 김경식 뿐 아니라 [[신동엽]], [[홍록기]] 등 자사 출신 신인급한테 밀려서 용도폐기되었다.] 하지만 SBS에서 자리를 못 잡기도 했고, 당시 SBS가 수도권에서만 송출되고 지방에서 방송이 송출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을 안 하고[* 물론 지방이라고 해도 중계유선방송으로 송출되는곳도 있었지만 아무튼 전국구 방송인으로써 메리트가 떨어진것은 사실이었다.] 한 이적인지라 인기도 떨어졌기에 [[1992년]] [[2월]] KBS로 다시 이적했으며, 이 이적은 KBS의 좋은 선전거리가 되어서 심형래는 아침 방송 토크쇼에 나와서 SBS 디스와 KBS에 대한 회한을 공개적으로 선언하기도 했다. 심형래는 1994년 11월부터 1995년 2월 초까지 SBS <웃으며 삽시다>에서 방송된 '[[수퍼파워 김치맨]]'으로 SBS에 복귀를 했지만 이 코너가 본인의 마지막 SBS 코미디 출연작이 됐으며[* 당시 '웃으며 삽시다' 코너에는 심형래와 비슷한 키였던 김은태, 윤정수, 김경식 등이 고정 출연을 하고 있었다.] 90년대 중반 KBS의 코미디 프로그램인 '코미디 일번지'에 주연급으로 등장하여 [[폼은 일시적이지만 클래스는 영원하다|클래스는 영원하다]]는 걸 보여줬다. 이후 [[개그콘서트]]에도 출연했지만, 2000년에 몇 주 출연하다 말았고, 2000년대 초중반 복권추첨을 겸한 쇼 코미디 프로그램인 [[쇼 행운열차]]가 그의 마지막 TV코미디 커리어가 된다. 하지만 쇼 행운열차는 일요일 점심시간대에 방영되어 낮은 시청률을 기록하던 꽤나 마이너한 프로그램인지라 사람들의 기억 속엔 용가리 이후로 코미디는 은퇴한 줄 알고 있다. 물론, [[복권]]을 주기적으로 사는 사람들은 간간히 심형래를 봤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