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심정 (문단 편집) == 생애 == [[1차 왕자의 난]]과 [[2차 왕자의 난]] 당시 [[공신]]이었던 심귀령(沈龜齡)의 증손이다.[* 사실 심귀령은 공신이라고는 해도 4등 공신으로 이름만 올린 수준이었으며 [[여말선초]]의 무장 중 1명으로 생각하면 된다.] 조선시대 심씨 고위 인사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청송 심씨]]가 아니고 [[풍산 심씨]]이다. 1495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502년 별시 [[과거 제도#문과|문과]]에 급제했으며 [[무오사화]], [[갑자사화]] 등을 극적으로 피했다. 1503년 수찬을 거쳐 1506년 [[중종반정]]이 터지자 가담하여 [[공신#s-1.4.9|정국공신]] 3등으로 화천군(花川君)에 봉해졌다. 1507년 [[중추부]]지사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김공저(金公著)와 조광보(趙光輔)가 역모를 일으켰다며 [[남곤]], [[김전]], 김극성(金克成) 등과 함께 폭로하여 상을 받았다. 반면 이 옥사를 [[훈구파]] 대신들(특히 [[류자광]])을 싫어했던 신진 [[사림파]]의 실제 어설픈 기도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중종실록]]》에 따르면 이 모의에 참여했던 김공저는 먼저 밀고하여 귀양에 그쳤고 남곤, 심정 등은 뒤에 "좀 더 천천히 알아보고 고하려고 했다"면서 고변했는데 상을 받았다. 이런 사림에는 넓게는 [[조광조]]까지 포함되었으나 불문에 부쳤으므로 사림들이 이 사실을 늦게 고변한 남곤, 심정을 싫어하게 될만도 하지만 심정 등의 입장에서는 또 목숨이 걸린 것이었다. 1509년 성천부사 등 외직을 전전하다가 1515년 [[이조판서]]까지 승진했으나 [[삼사(조선)|삼사]]의 탄핵으로 물러났는데 그 뒤를 이어 이조판서가 된 사람이 남곤이다. 1518년 [[형조판서]]의 물망에 올랐으나 조광조 등 사림파의 비난 및 소인(小人)으로 지목받은 것과, 이조판서였던 안당(安瑭) 등의 거부로 임명받지 못했다. 이후 [[한성판윤]]을 거쳐 우여곡절 끝에 형조판서를 지냈지만, 조광조 일파의 탄핵으로 파직당해 정국공신 명단에서도 삭탈당하자 원한을 품고 김전, 홍경주 등과 [[기묘사화]]를 일으켜 사류를 모조리 숙청할 계획을 세운다. 이후 [[한강]]변에 정자를 지어 울분을 달래던 중 아들 심사손(沈思遜)마저 조광조 일파의 탄핵으로 파직당하자 조광조 등의 사류에 대한 원망이 골수에 맺혀 틈만 노리게 되었다. 이 때쯤 되면 [[정광필]], 안당, 남곤 등도 조광조 일파의 지나친 탄핵질에 우려를 나타내고 거리를 두게 된다. 1519년 이조판서를 거쳐 한직으로 물러났다가 조광조 등이 위훈삭제(僞勳削除)를 요구하여 반정 공신들로부터 심한 반발을 받게 되자 [[경빈 박씨(중종)|경빈 박씨]]를 통하여 '조씨전국(趙氏專國)'[* 조씨에게 나라가 넘어간다는 뜻.]의 [[유언비어]]를 궁중에 퍼뜨리고 홍경주 등과 모의해 중종을 움직여 기묘사화를 일으키면서 사류를 일망타진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그러나 밤에 비밀리에 [[재상]]들을 부른 것은 중종이고 조광조를 비난한 것도 중종이었기 때문에 중종의 [[친위 쿠데타]]가 맞다. 당장 실록에서도 신하들이 중종을 꼬드겼다는 헛소문이 돈다며 '''정광필부터가 모든 것이 다 왕이 주도한 왕의 뜻이라는 것을 널리 밝히라고 진언한다.''' 심정은 조광조와 악감정이 있었어도 삭탈관직이나 [[유배]]로 끝내려 했지 [[사약|사사]]까지는 너무 지나치다고 중종에게 건의할 정도였다. 1522년 [[비변사]] 제조, 1527년 [[우의정]]에 이어 남곤, 김전 등과 함께 정권을 장악했으나 1527년 [[영의정]] 남곤이 죽고 김전마저 죽은 뒤 [[좌의정]]·화천부원군(花川府院君)에 올라 수하에 이항(李沆)과 김극핍(金克愊)을 두고 권력을 독점하게 됐다. [[세자]](뒷날의 [[인종(조선)|인종]])의 누나 [[효혜공주]]의 시아버지인 이조판서 [[김안로]][* 김안로는 [[김종직]]의 제자인 [[김전]]의 동생 김흔의 아들이였는데 김전이 중종반정을 계기로 후배 사림파와 원수가 되고 자신은 중종의 딸을 며느리로 삼으면서 [[외척]]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와의 경계는 이 때 더욱 격렬해졌는데 [[이행]] 등과 함께 대신과 [[육조]], [[대간#臺諫]]을 총동원하여 김안로를 밀어내게 된다. 하지만 직후 경빈 박씨가 세자를 저주했다는 [[작서의 변]] 사건이 터지면서 경빈 박씨파로 몰려 김안로의 사주를 받은 [[대사헌]] 김근사(金謹思), [[대사간]] 권예(權輗)의 탄핵으로 [[평안도]] [[강서군|강서현]][* [[서울특별시]] 강서구가 아니다.]으로 귀양갔다. 이항, 김극핍과 함께 '''신묘삼간(辛卯三奸)'''으로 지목된데다가 김안로의 탄핵으로 경빈 박씨의 뇌물을 받았다는 죄목을 뒤집어 쓰고 사사되었다. 김안로 때문에 몰락했기에 '상은이 지중하다.'라는 말을 남긴 다음에는 죽기 직전까지 "원수 김안로!"를 연발하다가 죽었다.[* 이 장면은 2001년 [[SBS]] 드라마 〈[[여인천하]]〉에도 나왔다.] 기묘사화가 일어난 지 12년 뒤에 벌어진 일로, 후일 김안로가 죽은 뒤에도 사림의 미움을 받아 사면 복권되지 못하고 소인의 대표적 인물로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두고두고 욕먹었다.[* 사실 김안로를 앞세운 것이 사림이었고, 당시 사림은 김안로를 위해서 죄없는 심정과 이행 등을 모함했다라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 사림은 이를 두고 "우리를 해하려는 근거 없는 모함"이라고 일축했는데, 만약 심정과 이행이 억울하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역으로 공격당할 거라 생각해 사림 입장에선 어떻게든 심정과 이행은 죽었어야 했고, 죄를 뒤집어써야만 했다.] 심정은 남곤 못잖게 청렴했으며[* 그들이 관학파 출신이었다는걸 상기하자. 세도가 극에 달하게 되는건 권력이 견제없이 집중된 [[김안로]], [[윤원형]] 때의 일.] 자기 가족은 끔찍이 챙겨 형제간에 우의는 지극하여 곤경에 처한 동생 심의(沈義)를 끝까지 보살펴주었다고 한다. 한편 유배지에 있을 때 변방의 만포 첨사로 있던 장남 심사손이 [[여진족]]에게 살해됐다는 비보를 접한다. 차남 심사순은 아버지의 일로 국문을 받았음에도 끝까지 자백을 하지 않았다가 결국 절명했다. 손자 심수경은 처신을 잘하여 가문의 명예를 회복했다. 그럼에도 심정 본인은 끝까지 명예를 회복하지 못하고 조선시대 내내 [[간신]]의 대표로 남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