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심재민 (문단 편집) === 아마추어 시절 === [[리틀야구]] 시절부터 대표 선수로 선발될 정도의 유망주였다. 어린 시절부터 이미 또래 아이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클 정도로 덩치가 컸고 13세 어린이 선수가 던진다고는 믿기 어려운 시속 130km대의 광속구를 던졌기에 전국적으로도 주목을 한몸에 받던 초특급 유망주가 심재민이었다.[* 시속 130km대의 직구 구속은 보통 신체 성장이 어느 정도 완성된 고교야구에서나 볼 수 있는 속도다. 다만 키가 어렸을 때는 굉장히 크다가 크질 않아서 성인이 되어서는 별로 크지 않은 사람들을 볼 수 있듯 구속도 어렸을 때 던진 광속구가 나이 먹고 밋밋해지는 경우가 있다. [[클레이튼 커쇼]]가 리틀야구에서 유명해진 모네 데이비스에 대해서 한 말도 "만 13세인 현재 70마일을 던질 수 있는데 그녀가 90마일을 던질 수 있다면 메이저리그에서 볼 수 있을 것"이었다. 현재 70마일을 던질 수 있으니 미래에 90마일은 문제가 아닐 거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현재 구속과 본인이 성장했을 때 구속의 상관관계가 그렇게 명확하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http://www.thepostgame.com/blog/eye-performance/201408/clayton-kershaw-mo-ne-davis-little-league-world-series-pitching-baseball|참고기사]] ] 특히 초등학생 시절 [[김응용]] 당시 [[삼성 라이온즈]] 사장의 눈에 들어 김 사장의 후원을 직접 받게 되었다. 이유인즉 심재민의 모습이 감독 시절 김응용의 이상형 투수와 그대로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김응용은 감독 시절 내내 덩치 크고 밥 잘 먹고 빠른 공을 던지는 왼손투수를 오매불망 기다렸지만 정작 감독을 하던 중에는 그런 선수와 함께 야구해본 적이 없었다.[* [[해태 타이거즈]] 시절은 희한하게 좌투수가 부족했다. [[김정수(1962)|김정수]]가 있었지만 늘상 제구가 불안했고 [[신동수(1966)|신동수]]와 [[강태원]]은 볼이 빠르지 않았다. 이후 덩치 크고 구속이 빠르던 고교생 좌완투수 유망주 [[강영식]]과 [[채태인]]에 푹 빠졌고 두 사람을 김응용의 광주 자택으로 불러서 직접 밥을 해먹이며 키울 정도로 애지중지했다. 결국 강영식은 해태 감독 시절 영입했다가 삼성 감독으로 가면서 비슷한 시기에 데려갔고 채태인은 삼성 사장이 됐을 때 특별지명으로 데려왔지만 아쉽게도 이미 타자로 전향한 뒤였다. 감독 말년에 [[한화 이글스]]로 갔던 것도 그의 워너비 투수였던 [[류현진]]을 써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지만 김응용이 오기도 전에 한화 구단 측이 이미 류현진의 미국행을 확정지으면서 그의 꿈도 박살났다.] 그랬기에 심재민의 등장이 엄청나게 반가웠을 터. 김응용은 삼성 사장 시절 미래의 선수 자원 물색 차원에서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리틀야구 경기를 자주 보러 다녔는데 그러던 중 심재민의 모습에 푹 빠졌고 이후 심재민이 개성중학교와 개성고등학교로 진학할 수 있게끔 했다. 참고로 개성중과 개성고는 김응용의 모교다. 이 당시의 인연이 있어서인지 프로가 된 이후에도 심재민은 김응용을 할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한다. 전국 1위 유망주로 주목을 받았으나 대한민국 학생야구에서 뛰던 유망주 투수들의 사례가 늘 그렇듯 개성중과 개성고에서 많은 공을 던지며 혹사당했다. 하지만 실력은 정말 빼어나서 고교 2학년 때 이미 고교 최고의 좌완 에이스로 평가를 받았으며, 타자로서도 나쁘지 않은 실력을 보여줬다.예로 2학년 때 선발투수가 조기강판 당하자 투입되어 무실점 피칭을 한 뒤 홈런을 쳐 원맨쇼를 벌였다. 2012년 한국에서 열린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 출전했을 당시 전반적으로 인상적이지 않았던 대표팀에서 고교 2학년의 몸으로 좋은 실력을 보여주면서 일찍부터 각 구단 스카우트의 눈도장을 찍었다. 하지만 고교 3학년 때는 거의 뛰지 못했는데 이 때 전년도 최하위였던 [[한화 이글스]]가 개성고와 연관이 있는 [[김응용]] 감독을 앞세워 사전 접촉을 해서 고의로 뛰지 않는 것이라는 의혹도 일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김응용과의 개인적 인연과 [[KBO 신인 드래프트|프로야구 신인지명제도 체계]] 자체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오해다. 김응용은 삼성 사장-고문시절부터 여러 유망주들을 지원했는데[* 김응용 사장은 삼성 사장 시절부터 소일거리식으로 전국 곳곳에 아마야구를 보러 다녔고 눈에 띄는 유망주는 직접 지원에 나섰는데 이 때 발굴한 재목이 [[송창현]]과 [[구자욱]]이다.] 심재민은 이 당시 지원대상에 속했던 여러 아마 유망주 중의 하나였고 한화에서는 특별지명권을 쥔 kt와 연고 구단인 롯데에서 지명하는 것을 막을 방법도 없었기 때문에 어그로성 억측에 불과한 것이다. 게다가 이미 예전에 팔꿈치 부상을 당했고 그 뒤로도 팔꿈치 상태가 안 좋은 건 전국의 스카우트가 모두 아는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유급을 두 번이나 했다.] 결국 신생팀 특별지명권을 쥔 kt wiz가 장래성을 보고 우선지명하였고 kt도 당시 건강하게 던지던 고교 좌완투수 [[제주고등학교 야구부|제주고등학교]]의 [[임지섭]]을 제치고 심재민을 선택했다. 팔꿈치 부상으로 인해 고교 3학년 때는 뛰지 못했지만, 2학년 때 보여준 모습 하나가 너무 좋았기 때문이고 kt가 창단 후에 1년간 퓨쳐스에서 뛰는 동안 심재민을 재활시킨 뒤 1군 리그에 데뷔할 때 등판시키면 된다는 판단 하에 내린 선택.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