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실향민 (문단 편집) === 현황 === 실향민의 출신을 살펴보면, [[황해도]] 출신이 35%로 가장 많고, [[함경북도]] 출신이 가장 적어 남쪽과의 거리와 반비례함을 알 수 있다. 다만 [[이산가족]]의 경우 [[평안도]], [[함경도]] 출신이 비교적 많다.[* [[북한이탈주민]]은 이와 반대로 [[함경북도]]가 가장 많다.] [[황해도]], [[미수복 경기도]], [[미수복 강원특별자치도|미수복 강원도]] 출신 실향민들은 [[대한민국|남한]]과 가까워 가족 단위로 온 사람들이 많았지만[* 개성시의 경우 당시 9만 명의 인구 중 3만 명만이 월남했다고 한다. 전쟁 전에도 대한민국 영토였기 때문에 북한의 점령이 일시적이라고 생각해 피난민이 많지 않았고, 피난을 가더라도 가족 중 일부만 간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출처: 박소영.(2016). 한국전쟁 이후 개성주민의 삶의 변화 연구.], [[평안도]], [[함경도]] 출신 주민들은 혼자 월남하거나 가족들 중 일부만 월남한 사람들이 많았다. 또, 실향민 2세를 대상으로 자신의 고향을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겠느냐는 설문에 응답자의 46%가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말한 뒤 이북계라고 말한다.'라고 응답하였고, 응답자의 42%가 '아버지의 고향은 곧 나의 고향이므로 바로 북한의 지명을 말한다.'라고 응답하여 실향민 2세들의 계승의식이 강력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다만, 3세로 가면 전자는 몰라도 후자의 비율이 급감하는데, 10대~30대에 해당하는 3세들은 바로 [[이북 5도|북한]]의 지명을 말했다간 [[북한이탈주민]]으로 오해받기 쉬운지라 조부모의 고향에 대한 강력한 프라이드가 없으면 그냥 [[대한민국|남한]]의 출생지를 말한다. 본적지를 언급하는 사람이 아예 없진 않지만, 2세들에 비해 찾기 힘들다.[* 그러나 그렇다고 실향민 집안의 사람들에게 "[[북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식의 질문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가뜩이나 조부모 내지 부모한테 고향 땅 못 가게 만든 [[백두혈통|김씨 일가]]들에 대한 각종 원망 - 증오 - 분노에 가까운 발언들을 들어온 이상 당연히 좋은 반응이 나오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 일부 정통주의가 강한 실향민 집안은 명절에도 북한식으로 조반상을 준비한다. [[떡국]] 대신 [[만둣국]], 면류로 명절 음식을 준비한다는 집안이 있다면 대부분 북한계 혈통이니 참고하는 것도 좋다.] 사실 젊은 세대들은 고향을 남한 쪽의 고향으로 말하는 게 당연하다. 일단 실향민 3세대가 되면 조부모 양쪽이 다 실향민일 가능성도 별로 없고 이미 그 실향민이었다는 조부모들도 남한에서 더 오래 살았을 마당에 자신의 조부모가 [[6.25 전쟁]] 때 피난민이었다는 정도만 인식할 뿐이다. 물론 [[남북통일|통일]]에 관심이 있거나 [[북한이탈주민]]들과 가까운 사람들도 많고, [[이북 5도|이북5도위원회]]와 [[통일부]]도 실향민들과 그 후손들, [[북한이탈주민]] 간 협력 체계를 구축하고 관리하고 있다. 사실 실향민이라고 하면 대놓고 오해를 받을 수 있지만 오히려 가족과 이별하고 고향을 떠나게 만든 [[백두혈통|김일성 일가]], [[조선로동당|북한 정권]],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감이 남한 본토 출신 사람들보다 더 강한 경우가 많다. 물론 사람의 정치관이란 다양한 만큼 이런 고통은 강경하게는 물론 유화적으로도 풀 수 있다는 사람도 있기는 하다. 실향민이 엄청나게 많은 관계로 실향민이면서 정부요직을 맡은 사람들도 엄청나게 많다. 당장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부터가 [[황해도]] 출신이고, [[김구]]도 [[황해도]] 출신이다. 초장기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한 [[김형욱]]도 실향민 출신이며 [[6.25 전쟁]] 초기에 [[대한민국 국군|군]]을 지휘한 [[채병덕]], 초대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6.25 전쟁]] 참전용사이자 [[최재형]] [[감사원장]]의 부친인 [[최영섭(군인)|최영섭]], [[베트남 전쟁]] 당시 당시 파월 국군 사령관을 역임했던 [[채명신]] 역시 실향민 출신이다. [[6.25 전쟁]] 이후부터 [[국민의 정부]]까지 실향민 중 정부 요직에 오른 사람이 많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제24대 국정원장이자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에 깊은 관여를 한 [[임동원]] 등이 있다. 현역으로 정치활동을 하는 인사로는 [[김진표]][* 다만 이 경우는 어린 아이 때 내려온 것이라 어머니가 [[이북 5도|이북]]에 남겨지게 되어 스스로 실향민이라는 인식은 있겠지만 [[이북 5도|이북 지역]]에 자신의 정체성을 깊이 결부시키지는 않는다. 비슷한 사례로는 자신의 고향이 [[충청도]]라고 한 [[황해도]]에서 태어난 가수 [[조영남]]이 있다. 분단의 아픔을 깊게 느껴 지역갈등을 싫어하여 [[화개장터]] 같은 노래를 펴낸 정도다. [[이회창]]은 더 심하여 아버지가 [[충청남도]] 사람이지만 자주 옮겨다니다가 [[황해도]]에서 태어난 것이라고 한다.], [[김형석(교육자)|김형석]], 임동원 등이 있다. 최근까지는 [[김동길]] 교수도 유튜브를 운영하며 정치 활동을 했었다. 이 외에도 수가 꽤 많은 관계로 한국 사회에 영향을 끼쳤거나 지금도 영향을 주는 경우가 있다. 경제적으로도 북한의 박해를 피해 상업을 영위하고자 한 사람들이 있어 [[현대그룹]] 초대 회장 [[정주영]]이나 기타 현재까지 내려오는 식품이나 유통 관련 기업을 창업한 실향민도 있다. 그리고 일부 기업가들은 개성 상인의 후손인 사례도 있다.[* [[아모레퍼시픽]], [[OCI]]의 창업주가 개성 상인의 후손이다.] [[개신교/대한민국|대한민국의 개신교]] 주요 인사들도 실향민 비중이 높고, 문화예술계 인사도 있으며, 연예계에는 [[김동건(방송인)|김동건]], [[윤여정]], [[이상벽]], [[이순재]], [[현미(가수)|현미]], [[조영남]], [[전원주]][* [[윤여정]]과 [[이상벽]]을 빼면 북한 땅이나 그곳 풍습에 대한 기억이 어느 정도 있다. [[현미(가수)|현미]]는 아예 여동생이 지금도 북한에 있고, [[이순재]]는 [[인간극장]]에서 탈북자인 배우 [[김아라]] 씨를 보고 동향 사람이라고 하기도 했다. 고인이 된 [[송해]] 역시 유명한 이산가족이자 실향민이었는데, [[전국노래자랑]]을 [[황해도]]에서 하고 싶다고도 했다. 그러나 송해는 안타깝게도 [[2022년]] [[6월 8일]] 사망하면서 그 꿈을 이루지 못하게 됐다.]가 지금도 유명하며, 교육 쪽으로는 [[경희대학교|경희대]] [[조영식|설립자]][* 그런 까닭에 실향민 2세인 [[문재인]]이 [[경희대학교|경희대]]에 진학했다.]나 [[숭실대학교|숭실대]] 초대 총장 등 [[숭실대학교|숭실대]]와 관련된 인사들, [[성문종합영어]] 저자인 [[송성문(교육인)|송성문]], [[경북대학교]] 총장이었던 [[고병간]], [[계철순]], [[장영희]] 교수[* [[장영희]] 교수의 부친과 모친 모두 [[평안남도]] 출신이다.]의 부친인 장왕록 박사, 소설가인 [[황순원]], [[박완서]] 등의 인사가 있다. 심지어 한국 의료보험의 창시자라고도 불리는 의사 [[장기려]]는 북한이 세워지고 나서도 김일성을 수술한 바가 있다. 스포츠계에도 야구 지도자로 유명한 [[김동엽(1938)|김동엽]], [[김응용]], 마라토너 [[손기정]] 등이 있다. 2020년대 현재 실향민의 출생연도가 [[20세기]] 초반이기에 지금은 상당수가 작고했으며, 생존한 사람들은 대부분 80대 이상의 고령이다. 그래서 2010년대까지 [[대한민국 정부]] 측에서 [[북한]]과의 협상에서 중요하게 다뤘던 것 중 하나가 바로 [[남북 이산가족 상봉]]인데 이는 실향민들의 나이가 매우 고령이고, 이들의 죽음은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남북한 간의 연결 매개체를 아예 단절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2020년대 현재에는 대부분이 고령으로 사망하기는 했지만, 아직 살아있는 이산가족들이 남아 있어서 2020년대까지는 이산가족 상봉 문제가 남북관계에서 의제 중 하나로 다뤄질 것으로 보인다. 자세한 사항은 [[남북 이산가족 상봉]] 문서를 참고. 실향민 중 [[6.25 전쟁|전쟁]] 이전에 월남한 사람들은 주로 도시 지역에 정착했고, 전쟁 이후에 월남한 사람들은 군 지역에도 많이 정착했다는 통계가 있다. 전쟁 이전 월남자는 약 80만 명으로 추산되며, 전쟁 기간 월남자는 약 6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인희(1986). 8.15와 6.25를 전후한 북한 출신 피난민의 월남이동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지리학과 석사학위 논문][* 기간별 월남자 추정치는 연구에 따라 상이하다. 전쟁 이전 월남자의 수가 60만 규모이고, 전쟁 기간의 월남자가 80만 이상이라고 비정하는 연구도 있고, 전쟁 이전과 전쟁 기간의 월남자가 서로 비슷하다는 연구도 있다.] 그 외 간척사업, 관개사업으로 인해 지형변화가 많기 때문에 고향의 행정구역 자체가 소멸해버려서 실향민이 된 케이스도 존재한다. 댐이 건설되어 수몰된 지역이 대표적이고[* 대표적인 사례로 배우 [[임하룡]]이 있는데, 어린 시절 살던 동네가 [[충주댐]] 공사로 수몰되었다고 한다.], 자연재해나 인재로 고향이 박살나 아예 없어진 케이스도 존재하며 극단적인 인구유출로 인해 자연소멸된 케이스도 있다. 실향민 비율이 가장 높은 성씨는 [[계(성씨)|계]](桂)씨와 [[궁(성씨)|궁]](弓)씨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