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실레시아 (문단 편집) === 합스부르크 왕조의 지배 (1526 ~ 1740) === [[파일:Growth-of-Habsburg-Empire-b.jpg]] 블라디슬라프의 아들 [[러요시 2세|루드비크]]가 당대 동유럽을 휩쓸던 [[오스만 제국]]과의 [[모하치 전투]]에서 전사하자 보헤미아의 귀족 의회는 루드비크의 매부인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오스트리아 대공국|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1세]]를 보헤미아의 왕으로 선출해 실레시아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 시기 실레시아는 빠르게 [[프로테스탄트]]화 되었는데 15세기 후스 전쟁에서 헝가리 왕을 지지하면서까지 가톨릭을 고수했던 것과 비교하면 좀 특이한 현상이었다. 브레슬라우의 시 의회는 1523년부터 [[종교 개혁]]을 결의하고 가톨릭 관습들을 폐지해 나갔다. 페르디난트 1세가 사망하는 1564년 실레시아 전체에서 가톨릭 신자의 수는 10%남짓에 불과했다. 페르디난트 1세가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점차 중앙집권을 강화하면서 귀족들의 힘이 약해져 갔고 프로테스탄트의 새로운 경제 이념을 받아들이면서 실레시아 지역도 빠르게 재건되고 다시 번영하기 시작했다. [[파일:30yw death rate.jpg]] ↑ 30년 전쟁 기간 독일 각지의 인구 감소. 실레시아 역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1618년 [[프라하]] 창문투척에 이은 보헤미아 봉기([[30년 전쟁]]의 시작) 때, 실레시아도 봉기에 동참했다. 봉기가 실패로 끝난 뒤 실레시아는 프로테스탄트 연맹에 참가하기도 하고 중립으로 남기도 했는데, 여러 차례 제국군과 반 합스부르크 동맹 간의 전쟁터가 되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1626년 황제군 사령관 [[발렌슈타인]]에게 데사우 다리 전투에서 크게 격파당한 신교군의 용병대장 [[https://en.wikipedia.org/wiki/Ernst_von_Mansfeld|에른스트 폰 만스펠트]](Ernst von Mansfeld)는 군대를 재정비한 뒤 그대로 헝가리로 침공해 들어갔는데, 이때 실레시아를 가로질러 갔다. 그러자 만스펠트를 추격하던 황제군이 실레시아를 침공해 큰 피해를 입혔다. 만스펠트가 1626년 겨울 병으로 사망하고 만스펠트의 군대가 흩어지자, 발렌슈타인은 1627년 실레시아의 자간 공국과 글루가우 공국의 공작이 되었고 이 지역에 황제군 사령부를 세웠다. 따라서 실레시아는 필연적으로 반 제국 연합의 1차적인 목표가 되었다. 1632년 [[스웨덴 제국|스웨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브란덴부르크]], [[작센 선제후국|작센]]으로 구성된 반 제국군이 먼저 실레시아를 침공해 전쟁이 재발했고 실레시아는 프로테스탄트 연맹에 참가했는데, 처음 기세를 올리던 연합군은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전사하고 복권된 제국군의 명장 발렌슈타인이 다시 활약해 밀려났다. 이런 와중 주요 동맹이었던 작센이 1635년 갑자기 동맹을 빠져나가면서 실레시아는 엄청난 피해를 입고 다시 제국에 복속되었다. 이후 실레시아는 중립을 지켰고 잠시 평화로웠지만 1639년부터 전쟁이 끝날때까지 다시 전쟁통이 되어 저지 실레시아 전체가 심하게 파괴되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중심도시 브레슬라우는 파괴를 면했지만, 1100개의 마을, 113개의 성이 파괴되는 등 실레시아의 나머지 지역은 크게 황폐해졌고 실레시아 인구의 3분의 1이 난리통 속에 죽거나 터전을 버리고 떠나갔다.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브레슬라우를 포함한 실레시아의 주요 도시들은 종교의 자유를 인정받았지만 그렇지 못했던 나머지 지역들의 프로테스탄트들은 억압당했고 빠르게 재가톨릭되었했다. [[파일:Commonwealth 1660.png]] ↑ 연방 서쪽 고지 실레시아 지역의 노란 영토가 오폴레-라치부시 공국. 한편 30년 전쟁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1645년부터 1666년까지 고지 실레시아의 대부분인 오폴레-라치부시 공국을 잠시나마 다시 지배했다. 여기 얽힌 외교전이 참 복잡하다. 1637년 폴란드-리투아니아 바사 왕조의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https://de.wikipedia.org/wiki/C%C3%A4cilia_Renata_von_%C3%96sterreich|체칠리아 레나타]](Cäcilia Renata von Österreich)와 결혼했는데 한창 30년 전쟁으로 정신이 없던 합스부르크 제국은 연방에 [[지참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이때 연방은 보헤미아에 흩뿌려진 작은 영토들을 조금 가지고 있었는데, 이 영토들을 넘기고 지참금으로 고지 실레시아를 받고자 했지만 합스부르크 제국은 이를 거절했다. 이것을 이용해 합스부르크의 적이던 [[프랑스 왕국|프랑스]]가 연방에 승전 후 고지 실레시아를 주는 조건으로 전쟁 참여를 꼬드기는 제안을 했지만 연방은 참전을 거부했다. 그런데 1641년 반 합스부르크 연합의 맹주격이던 스웨덴이 다시 합스부르크 제국의 보헤미아 왕국을 침공해 저지 실레시아 전체를 휩쓸고 고지 실레시아로 진격하자 놀란 연방은 [[덴마크-노르웨이 왕국|덴마크]]에 합스부르크 편에 참전해 스웨덴에 맞서라고 설득하기도 했으며, 이것을 가지고 다시 합스부르크에 고지 실레시아를 요구했다. 1644년 [[페르디난트 3세]]는 실레시아 전역에서 참패해 이 지역 전체를 점령당하고 말았고 결국 연방의 제의를 받아들여 오폴레-라치부시 공국을 넘겼다. 짧은 지배였지만 이 20년동안 고지 실레시아의 독일화를 상당히 늦출 수 있었고 덕분에 고지 실레시아는 마지막까지 폴란드인이 다수를 점하는 곳이 되었다. 1655년 [[대홍수(역사)|대홍수]] 당시에는 연방의 왕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가 이곳으로 피신한 뒤 반격을 지휘하기도 했다. 연방의 지배는 1666년 합스부르크의 [[레오폴트 1세]]가 12만 굴덴으로 이 지역을 다시 사들이면서 끝났다. 연방의 지배기간 동안 프로테스탄트가 다수였던 고지 실레시아는 다시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받게 된 뒤 빠르게 재가톨릭화 되었다.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실레시아는 빠르게 재건되었고 인구는 오히려 전전 125만 명에서 150만 명으로 늘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다른 영지들과는 달리 실레시아는 종교 개혁의 영향을 빨리 받았고 주요 무역로가 지났기에 경제적으로 매우 발달해 있었다. 따라서 이 지역은 제국의 노른자 땅이었는데, 합스부르크 제국은 오래 전 [[합스부르크 네덜란드|플랑드르 지역]]을 잃었고[* 그러나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되찾아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라는 이름으로 100년 남짓한 기간동안 통치했다.] 드넓은 [[오스만 헝가리]]와 [[트란실바니아 공국]]도 복속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 가난했기 때문에 실레시아는 보헤미아,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대공국 본토와 더불어 합스부르크 제국의 경제를 지탱하는 지역이 되었다. 18세기 초, 실레시아가 차지하는 인구와 면적이 작음에도 불구하고 합스부르크 제국 1년 세입의 4분의 1 가까이를 차지했다. 그러다 보니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이 왕국으로 업그레이드한 [[프로이센 왕국]]이 이 부유한 땅을 노리기 시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