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실레시아 (문단 편집) === 보헤미아의 지배 (1335 ~ 1526) === [[파일:bohemia 14th.jpg]] 보헤미아 왕국이 룩셈부르크 왕조 지배하에서 14세기 중반 전성기를 누리자 실레시아도 경제적으로 크게 발전했다. 실레시아는 유럽 동서를 잇는 무역로인 '왕의 길(Via Regia)' 이 지나는 곳에 위치해 수많은 교역물품이 오갔고 중심도시 브라티슬라프는 중부유럽의 주요한 대도시로 성장했다. 하지만 룩셈부르크 왕조가 몰락한 뒤 실레시아는 곧 [[후스 전쟁]]의 중심이 되면서 번영은 몰락으로 바뀌고 말았다. 1378년 카를 4세 사후 룩셈부르크 왕조에 내분이 발생하자 왕국의 영토 각지에 대한 통치권이 약화되었고 강도귀족(Raubritter)들이 출현해 설쳤는데, 실레시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다 15세기 초반 [[후스파]]의 물결이 보헤미아를 덮쳤을 때, 보헤미아 지역과 [[모라비아]] 지역 등 왕국의 절반 이상이 후스파의 수중에 떨어졌지만 실레시아는 반 후스파 입장을 견지하며 당시 왕이던 카를 4세의 차남 [[지기스문트|지크문트]]를 지지했다. 분쟁기간 동안 실레시아의 군대가 왕국의 후스파 영토로 종종 침공해 들어가 보헤미아는 내전 상태에 빠져들고 실레시아 내부에서도 후스파와 가톨릭 귀족 간 분규가 일어났다. 1458년 포데브라트 가문의 후스파 귀족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이르지]](Jiří z Poděbrad)가 즉위하자 실레시아에는 개종의 압력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실레시아는 이르지의 라이벌이자 가톨릭 신자이던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마차시 1세]]를 지지했고 1466년 이르지가 교황에게 파문을 먹고 헝가리에게 침공당했을 때, 실레시아는 헝가리군과 싸우지 않고 마차시 1세를 환영했다. 그리고 다른 가톨릭 귀족들과 함께 마차시 1세를 보헤미아의 왕으로 삼아버렸다. 그렇게 헝가리 영토가 된 실레시아는 1490년 마차시 1세 사후 '또다른 왕이던' [[울라슬로 2세|블라디슬라프]][* 1469년 마차시 1세가 가톨릭 귀족들에 의해 '무단으로' 보헤미아의 왕이 되고 교황의 승인까지 받으면서 보헤미아에는 기존의 이르지와 더불어 두 명의 왕이 생겼다. 마차시 1세는 모라비아와 실레시아를 점령하며 눌러앉아 보헤미아의 왕좌를 고수했고, 1471년 이르지의 사후에는 폴란드 [[야기에우워 왕조]]의 블라디슬라프가 즉위하여 공동왕 시대가 계속되었다. 이 상태는 1490년 마차시 1세가 사망하면서 끝났다.]의 보헤미아로 다시 돌아왔다. 후스 전쟁 기간동안 실레시아는 분쟁의 중심이 되면서 무역로가 이 지역을 회피해버렸기 때문에 실레시아는 경제적으로 크게 망가졌다. 또한 농지가 황폐화되어 인구도 줄었다. 다시 보헤미아로 돌아온 실레시아는 재건되지 못했다. 당시 왕이던 블라디슬라프는 지지기반이 없고 귀족들을 통제할 능력이 없어 귀족 의회의 예스맨으로 전락한 어리고 무능한 왕이었고 그 무능함에 반한 헝가리의 귀족들마저 이 자를 울라슬로 2세로 헝가리 국왕에 선출[* 다만 울라슬로 2세의 어머니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가 [[알브레히트 2세|얼베르트 왕]]의 딸이자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라슬로 5세]]의 누이였고 선대왕인 [[브와디스와프 3세|울라슬로 1세]]의 조카였던 혈연도 어느정도 고려되기는 했다.]함에 따라 왕은 보헤미아를 비우고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부다]]에 머물러 버렸다. 따라서 보헤미아는 귀족들이 설치는 장이 되어 몰락했고 실레시아 또한 왕국과 함께 몰락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