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실레시아 (문단 편집) === 폴란드의 지배, 실롱스크 공국 (990s ~ 1335) === 실레시아는 10세기 후반부터 [[신성 로마 제국]]과 [[폴란드 왕국]]이 노리는 땅이 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3세]]는 보헤미아를 무시하고 오데르강과 그 수원을 제후국 중 하나인 마이센 변경백령(Markgrafschaft Meißen)[* 현재 독일 [[작센]] 주의 전신]의 경계로 삼아 실레시아 일부의 영유권을 주장했다. 하지만 폴란드 최초의 왕 [[미에슈코 1세]] 역시 이것을 무시하고 약 990년 경 보헤미아로부터 실레시아 전체를 정복했다. 자신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영토가 폴란드에 넘어감에도 불구하고 오토 3세는 주적이었던 보헤미아의 약화를 바라 폴란드를 지원했다. 1034년 미에슈코 2세 사후 폴란드가 이교도 반란으로 극도의 혼란에 빠지자 보헤미아의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1039년 대규모로 폴란드를 침공해 수도 [[포즈난]]과 [[그니에즈노]]를 파괴한 뒤 실레시아를 탈환했다. 하지만 1040년 즉위한 카지미에시 1세의 통치 아래 혼란을 수습하고 국력을 회복한 폴란드는 1054년 실레시아를 다시 빼앗았다. 이후에도 이 지역을 놓고 갈등이 계속되다가 1137년 두 나라가 크워즈코 평화조약을 맺으면서 실레시아와 보헤미아의 국경이 명확히 정해짐에 따라 두 나라의 갈등은 종지부를 찍었다. [[파일:1138 fragmentation.jpg]] ↑ 1138년 분열 직후의 폴란드. 노란색이 실롱스크 공국, 빨간색이 장자가 자신의 영지에 더해 통치하는 연장자령. 분홍색은 연장자령에 더해 장자가 속국으로 지배하는 서 포모제. 연장자령, 좀 더 구체적으론 [[크라쿠프]]를 통치하는 장자들이 폴란드의 고공(Maximus Dux)[* [[폴란드어]]로는 Książę zwierzchni]으로서 폴란드를 대표하는 군주가 되도록 했으며, 다른 공국들은 고공의 우월을 인정하는 것이 [[볼레스와프 3세 크쉬보우스티|볼레스와프 3세]]의 유언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 시스템은 볼레스와프 3세의 아들 대가 다 지나기도 전에 붕괴되었고 각 공국들은 독립된 국가가 되어 [[크라쿠프]], 폴란드 고공 자리를 놓고 다투었다. [[파일:silesia 12th.jpg]] ↑ 실롱스크 공국 1172년. 주황색은 볼레스와프, 초록색은 콘라드, 노란색은 미에슈코에게 돌아가며 분열된 실롱스크 공국. 나중에 노란색과 초록 지역이 합쳐져 오폴레-라치부시 공국[* 독일어 표기는 Herzogtum Oppeln und Ratibor, 폴란드어 표기는 Księstwo opolsko-raciborskie, 체코어 표기는 Opolsko-ratibořské knížectví이다.])이 되었고 이 나라는 고지 실레시아의 기원이 된다. 1138년 볼레스와프 3세의 유언에 따라 그의 아들들이 왕국을 나누어 가지면서 약 200년에 이르는 폴란드 분열 시대가 시작되었다. 볼레스와프 3세의 장자 브와디스와프는 실롱스크 공 브와디스와프 2세로서 실롱스크 공국을 중심으로 연장자령[* [[크라쿠프]], [[그단스크]] 등 폴란드 핵심도시와 폴란드 영토의 약 3분의 1을 차지하는 지역이었다. 유언에 따르면 장자인 브와디스와프가 실레시아 공국에 더해 지배하기로 되었으나 형제들 모두가 이 지역을 탐낸데다 브와디스와프 역시 고공으로서 동생들의 영토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려 했기에 사이가 좋을 수 없었다. 이들은 주구장창 싸운 끝에 결국 브와디스와프 2세는 쫓겨났다. 이 지역, 특히 [[크라쿠프]]를 차지하는 공작은 크라쿠프 공작이자 폴란드 고공으로서 폴란드를 대표하는 군주가 되었기에, 아들들의 대가 지나고서도 분열된 각 공국들은 이 타이틀을 얻고자 다퉜다.]과 [[포메른]]을 더해 지배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영토를 가져간 동생들과 싸우다 결국 쫓겨나버렸고 실롱스크 공작위는 그의 형제인 마조프셰 공 볼레스와프 4세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1163년 신성 로마 제국으로 망명했던 브와디스와프 2세의 세 아들들이 제국의 지원을 얻어 실레시아를 탈환했다. 이들은 실레시아를 1172년까지 공동 통치했지만 결국 땅을 나누어 가지기로 했고, 이 작은 공국은 다시 분열되어 큰형 볼레스와프는 실레시아의 북부를, 둘째 콘라드는 실레시아 중부를, 막내 미에슈코는 실레시아 남부를 나누어 가졌다. 콘라드가 성직자의 길을 가면서 콘라드의 땅은 미에슈코의 영토에 흡수되었고 이렇게 만들어진 볼레스와프와 미에슈코의 영토는 각각 저지 실레시아와 고지 실레시아의 기원이 되며, 고지 실레시아 지역에는 곧 오폴레-라치부시 공국이 들어섰다. [[파일:henryk monarchy.jpg]] ↑ 실롱스크 헨리크 군주국. 1241년. 13세기 초 실롱스크 공국의 헨리크 1세는 실레시아를 토대로 성장하여 분열된 폴란드 중 절반 가까이를 다시 통합했다. 그는 1232년 크라쿠프도 차지해 폴란드 고공이 되어 있었고 곧 왕으로 대관하려 했지만 현지 귀족들의 반발로 실패했다. 1238년 그가 사망할 때 유능한 아들 헨리크 2세에게 실롱스크 공작위와 폴란드 고공위를 물려주었고 헨리크 2세는 선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폴란드 통합을 계속했다. 그러나 1241년 헝가리 침공을 위해 미리 폴란드를 격파하기로 한 몽골군이 침공, [[레그니차 전투]]에서 헨리크 2세가 전사하면서 폴란드 통합의 꿈은 수포로 돌아갔다. 또한 이 전투에서 실롱스크 공국의 군대가 전멸하고 몽골군의 파괴 행위, 헨리크 2세의 청야 전술 때문에 실레시아 전역이 황폐해지면서 폴란드에서 가장 강했던 실롱스크 공국의 국력은 크게 약해졌다. 이 시기 실롱스크 공국의 수도이자 폴란드 전체의 정치 중심지로 기능하던 브로츠와프도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파일:silesia 14th.jpg]] ↑ 보헤미아로의 병합 직전 실레시아의 공국들. 가장 아래 노란색 공국은 치에신 공국인데 이 나라는 후일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간 40년에 걸친 골치 아픈 국경분쟁의 단초가 된다. 헨리크 2세 사후 실레시아 외부의 공국 영토들은 모두 떨어져 나갔다. 또한 수많은 피아스트 왕가의 방계들이 실레시아 곳곳에 살림을 차리고 나라를 세우면서 이 작은 공국은 또다시 여러 나라로 분열되었다. 1300년 보헤미아 국왕 [[바츨라프 2세]]가 폴란드 고공위를 차지하면서 실레시아 지역은 보헤미아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되었지만 여전히 실레시아 공국들의 통치자들은 자신들이 폴란드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1306년 보헤미아와 폴란드의 동군연합이 끝난 뒤, 위대한 브와디스와프 1세가 폴란드 고공이 되어 폴란드 통합의 막바지 작업을 수행하자 폴란드를 다시 분열시키려는 의도로 [[독일 기사단국]],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브란덴부르크]], 보헤미아는 반국가 동맹을 맺고 끊임없이 폴란드를 공격했다. 이 시기 실레시아의 피아스트 공작들은 실레시아에 대한 브와디스와프 1세의 종주권을 인정했고 1320년 브와디스와프 1세가 폴란드의 왕으로 즉위하며 통합 작업을 마무리하자 실레시아 피아스트 공작들은 다시 실레시아 지역이 폴란드 왕국의 경계 안에 있다고 선언하며 폴란드에 남길 원했다. 하지만 이미 실레시아 전역이 보헤미아의 영향에 들어간 뒤였기에 이 선언은 크게 의미가 없었고, 당시 폴란드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폴란드와 충돌하던 [[룩셈부르크 왕조]]의 [[보헤미아 왕국]] 국왕 [[카를 4세]]는 1335년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3세]]와 [[트렌친|트렌첸]] 조약을 맺어 폴란드 왕위를 영구히 포기하는 대신 실레시아의 보헤미아로의 병합을 인정받았다. 이후 1348년 남슬라우 조약으로 이 약속은 다시 확인되었다. 이 시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약 600년간 실레시아는 폴란드 역사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한편 동방식민운동에 따라 약 12세기 후반부터 실레시아에는 독일인이 많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다른 폴란드 지역과 마찬가지로 실레시아의 인구도 매우 적었는데 실롱스크 공국의 통치자들은 지역 발전을 위해 독일인의 이주를 장려했다. 하지만 그 움직임이 더디던 12세기 때와 달리, 헨리크 1세 치하에서 실롱스크 공국이 전성기를 누릴 때 헨리크 1세는 독일인의 활발한 이주를 허락했다. 특히 발전된 채광 기술을 가지고 있던 독일인 덕분에 곳곳에 광산이 세워져 실레시아의 지하자원들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고 광산 주위로 독일인 마을이 여럿 세워졌다. 13세기 중반 이후 [[몽골 제국]]의 침입으로 실레시아가 황폐화되자 실레시아의 공작들은 독일인들을 더 많이 받아들여 지역 재건에 도움을 받았다. 실레시아가 폴란드에서 떨어져 나간 뒤 1400년 경, 실레시아의 인구는 100만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때 저지 실레시아의 인구는 폴란드인과 독일인이 각각 절반씩 차지했다고 한다. 하지만 갈수록 독일인의 우세가 심화되어 갔다. 다만 좀 더 동쪽에 위치하던 고지 실레시아에는 이주의 물결이 적었고 여전히 절대다수가 폴란드인이었다. 이 지역에서의 폴란드인 우세는 [[제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비교적 오랫동안 유지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