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신해혁명 (문단 편집) == 신해혁명 이후 == 황제 선언으로 대륙에서 전국적인 어그로를 끌어모았던 위안스카이는 결국 퇴위로부터 3개월여 만인 1916년 6월 6일 환갑조차 맞지 못한 채 화병으로 그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276년이나 버텨온 청나라를 단숨에 무너뜨렸던 주인공치고는 너무나도 쓸쓸한 최후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자금성]]으로 쳐들어가 청나라 황제를 옥좌에서 끌어내린 장본인으로서 권력의 무상함과 전제 정치의 폐단을 누구보다 똑똑히 목격한 사람이 바로 이 위안스카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청년 시절부터 무수한 커리어를 쌓아 왔으며 당대 최강의 군사조직인 북양 군벌을 조직할 정도의 기량이면 머리 또한 남달리 비상했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자신의 손으로 없애버렸던 황제라는 지위를 다시 만들어 올라서고 끝내 파국을 자초했던 사실을 보면 이 황제 체제라는 것이 그동안 중국인들에게 얼마나 무섭도록 깊이 각인된 사상이었는가를 짐작케 한다. 비단 위안스카이뿐만 아니라 당시 중국인의 대부분에게 있어 황제는 현실에서 도달 가능한 최종 최후의 꿈의 자리가 아니었을까?[* 보통 전근대에 [[창업군주|한 나라의 첫 왕이나 황제]]가 되는 인물은 하다못해 하급 [[귀족]]이라도 되는데 중국은 역사상 평민 출신 창업황제만 [[고제(전한)|2]][[홍무제|명]]이 있을 뿐더러 심지어 [[석륵|노예 출신 창업황제]]도 있으며 통일왕조 창업주는 아니라도 황제에 오른 인물이 다른 나라에 비하면 상당히 많은 편이기 때문에 황제의 절대성과 상관없이 기회만 오면 강력한 힘을 사용하거나 민중의 신뢰를 받아 얼마든지 누구나 오를 수 있는 자리라는 인식이 있었을 것이다.] 위안스카이의 사후 그의 기반 조직이었던 북양군벌은 몇 개의 파벌로 분열되어 베이징을 중심으로 자기네들끼리 땅 따먹기에 돌입한다. 여기에 그간 위안스카이 밑에서 숨 죽이고 지내던 지방의 군벌들까지 대거 발호했는데 이 절호의 찬스를 이용해 먹으려는 [[일본 제국]]까지 가세하면서 중국 대륙은 그야말로 [[헬게이트]]로 돌입했다. 자세한 것은 [[군벌/중화민국|군벌]] 문서 참고. 제2혁명의 좌절 이후 [[일본 제국]]에 망명 중이던 [[쑨원]]은 기존 국민당의 후신인 중국혁명당을 창설했고 1919년 [[5.4 운동]]에 편승해 다시 [[중국국민당]]을 조직했다. 그러나 대군벌시대가 도래하면서 혁명의 투사 쑨원은 지방 군벌에 빌붙어 이리저리 떠도는 [[식객]]으로 전락해 버렸고 그런 와중에도 [[소련]]과의 대타협을 통해 1차 [[국공합작]]을 체결하는 등 노구를 아끼지 않았다. 천신만고 끝에 겨우 필요한 조건을 모두 갖춘 뒤 본격적인 군벌 진압, 즉 북벌을 추진하게 되었지만 [[1925년]] 쑨원은 간암으로 결국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쑨원이 남긴 마지막 [[유언]]은 '''"혁명은 아직 이룩되지 않았다."''' '''[[국민혁명|그리고 그 말은]] [[중화민국 국민정부|현실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