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해혁명 (문단 편집) == [[제3차 혁명]] == 명실상부한 독재자가 된 위안스카이였지만 그는 노망이라도 났는지 대총통으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황제를 꿈꾸기 시작했다. 이는 제 손으로 엎어 버린 황제 체제를 다시 되살리는 [[반동주의|반동]] 시도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1914년]] 당시 위안스카이는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한 [[일본 제국]]의 막대한 군사력과 재력을 탐내고 있었으며 일본 또한 [[협상국]]으로서 산동의 [[독일 제국군]] 축출을 명분으로 하는 중국 대륙으로의 개입 진행을 위해 위안스카이 정권의 협력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러한 쌍방의 이해가 일치하여 결국 1915년 5월 이른바 '''중국판 [[을사늑약]]'''이라 불리는 그 유명한 [[21개조 요구]]가 체결되었다. 이 합의를 훗날 1차 대전이 종전된 [[1919년]] 일본이 승전국 지위를 이용해 [[베르사유 조약]]으로 서구 사회로부터 정식 인증시킴으로서 중국 인민들의 분노가 대폭발해 [[5.4 운동]]으로 이어졌다. 아무튼 일본과의 조약 체결로 일본이라는 든든한 백그라운드를 확보한 위안스카이로서는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자작극인 황제 추대 운동이 벌어졌고 결국 위안스카이는 1915년 12월 12일 [[홍헌제제]]를 선포하여 1916년을 기하여 황제에 등극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이는 21개조 조약 체결로 분개하던 중국인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 결과가 되었고 이미 [[1915년]] 12월 25일 운남에서 [[차이어]]와 [[량치차오]]가 일으킨 봉기를 시작으로 1916년 2월에 이르러서는 전 중국적으로 위안스카이에 대해 격렬한 반발 폭동이 잇따랐다. 이때 차이어는 자신의 휘하 운남군을 호국군으로 개명하고 봉기를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제3혁명을 다른 이름으로 [[호국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미 조약을 끝맺은 일본은 사태를 관망할 뿐이었다. 심지어 위안스카이가 믿었던 서구 열강들조차 등을 돌리던 가운데 버틸 재간이 없었던 위안스카이는 결국 83일만인 1916년 3월 23일 즉위 선언을 취소하였고 6월 6일 급사했다. 진정한 의미에서 중국의 황제 체제를 종식시킨 혁명은 바로 이 제3혁명으로, 1차 혁명 발발로부터 채 5년도 되지 않은 사이 이렇게 중국은 송두리째 뿌리부터 뒤집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