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신해혁명 (문단 편집) == 제1차 혁명 == 좁은 의미로는 제1혁명만을 신해혁명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제2, 제3혁명 역시 제1혁명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이를 뭉뚱그려 신해혁명이라고 칭한다. 혁명이 임박했던 [[1911년]] 당시 [[이홍장]]과 [[서태후]]가 사라진 [[청나라]]는 서구 열강이 시시각각 침투해 들어오던 와중에 청나라의 지식층은 황실 사수를 도모하는 수구파, 입헌군주제를 지향하는 입헌파, 민주공화정을 열망하는 혁명파로 삼분되어 극도로 혼란한 상황에 빠져 있었다. 여기에 온갖 [[민족주의]] 세력, [[비밀결사]] 등이 개입하면서 혼란상은 날로 극심해져만 갔다. [[황화강 사건]]과 같은 사건이 그 예시. 쑨원은 대혁명가로서 신해혁명 이후 인구의 89% 이상을 차지했던 농노비들을 해방시키고 그 89%의 인구가 성씨가 없었지만 신해혁명 이후 성씨를 가지게 되었다. 당시 중국에서 백성들은 농노비와 마찬가지로 소수 귀족에 의해 노역과 소작농에 참여해야 했는데 신분 차별 자체를 폐지시키고 노역을 중지시켰다. 이후 인구의 89%가 넘던 중국 백성들은 민적법에 의해 대거 한족으로 등록되었다. [[1911년]] 5월 8일 황족인 경친왕 [[아이신기오로 이쾅]]을 초대 총리대신으로 삼은 청나라의 첫 번째 헌정 내각은 많은 개혁파[* 특히 청나라의 일부 전향적 조치에 기대하고 입헌내각운동을 벌이던 입헌파.]들을 실망시켰다. 한족은 13명 중 4명에 불과했으며 나머지 만주족 각료 가운데도 수상인 경친왕을 제외하더라도 7명이 황족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문제는 우전부(우체-통신부)대신 '''[[https://ko.wikipedia.org/wiki/성선회|성선회]](盛宣懷, 성쉬안화이)'''였다.~~생선회 아니다.~~ 이런 와중에 청나라의 지도층은 성선회의 주도로 민영으로 돌아가던 자국의 철도를 강제로 국유화, 그걸 담보로 삼아 열강에게 [[청나라 채권|차관]]을 얻으려는 짓을 터뜨렸...는데 사실 여기에 대해서는 당시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중국의 장거리 철도가 제대로 부설되기 시작한 건 [[청일전쟁]] 패배 이후다.[* 서태후가 이화원 중건과 회갑연 등에 사용한 예산은 명목상 해군예산이었지만 실은 [[텐진]]에서 산해관, [[심양|펑텐]]을 거쳐 길림까지 부설하려던 철도 건설비였고(이때만 해도 해군아문에서 철도 부설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이게 무산되는 바람에 청나라는 한반도로의 대규모 병력 전개에 애를 먹어 청일전쟁의 패배를 야기했다는 분석이 있다. 참고로 청나라가 철도 부설을 위해 여순에서 생산했던 6000 톤의 레일은 결국 청일전쟁 중에 일본군에게 넘어갔다.(...)] 중국이 건설한 최초의 철도는 1881년 6월 9일 당산(현 [[탕산시]])에서 석탄산지 [[https://baike.baidu.com/item/胥各庄镇|서각장]][* 현 탕산시 [[https://ko.wikipedia.org/wiki/펑난구|펑난구]] 펑난진(丰南镇). 2004년에 인펑진(银丰镇)과 통합되어 펑난진이 되었다.]으로 이어지는 9.7km 구간의 철도였다.[* 이후 이것이 [[톈진]]까지 이어진다.][* 개통일인 1881년 6월 9일은 [[조지 스티븐슨]]의 탄생 100주년이었다. 이날을 개통식으로 삼은건 이홍장의 결정이었다.] 또 중국인에 의해서 설계되고 공사된 최초의 철도는 [[https://ko.wikipedia.org/wiki/첨천우|첨천우]](詹天佑, 잔톈유)가 건설한 [[베이징]]에서 현재 [[내몽골자치구]]의 [[장자커우]][* [[몽골어]]로는 칼간. [[만리장성]]과 이어져 있는 도시기도 하다.]까지 180km의 거리로 이루어진 징장선(경장선)이었으며([[1905년]]~[[1909년]]) 징한선(베이징에서 한커우)[* 현재의 [[징광철도]]의 장강 이북 구간에 해당한다. 중화민국 국민정부 시기에는 베이징이 베이핑(北平)으로 개칭되면서 이 노선도 핑한선으로 불렸다.]이 건설된 정도였다. 그 외에는 징푸선(경포선, 베이징에서 난징)과 징펑선(경봉선, 베이징에서 [[선양시|봉천]]/펑텐까지)이 [[1912년]]까지 건설 상태에 있었다. 특히 길이 1,212km의 징한선은 개통 첫해인 1906년에만 350만냥이 넘는 수입을 올리면서 '철도는 돈이 된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철도건설이 활기를 띄었고 신해혁명 발발 직전 청나라의 철도총연장은 9,000km에 이르렀다.[* 이 중 41%는 외국이 부설한 것이다.] [[1897년]] 당시 [[양자강]]을 지나는 지역에 이익권을 가지고 있었던 영국은 [[광저우]]에서 '''한커우'''[* 한구(漢口). [[후베이성]]의 중심 도시로, 지금의 [[우한]] 북부]까지 이어지는 철도인 '''월한선'''[* 粤漢線. 광저우 지방이 "[[월]]" 지방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을 부설하는 것을 제안했다. 40년간 청의 부국강병을 위해 진력한 성선회는 이를 위협으로 판단하였다. "철로 부설권을 영국이 가지게 되면, 청조는 독립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그 상황에서 [[1900년]] 미국 자본(미국합흥회사)을 빌려 철도 국유화를 추진했다. 차관 400만 파운드[* 이후 4,000만 달러, 약 800만 파운드로 불어난다.]를 연 5.9%로 30년 동안 갚아나가려고 한 것이다. 일이 잘 된다면 북쪽의 베이징에서 내려오는 징한선(경한선)과 남쪽의 월한선이 이어지면서 베이징에서 광저우까지 이어지는 대동맥이 완성되는 것이었...겠지만[* 지금의 우한을 중간으로 삼는 이유는 후베이의 중심을 거대한 [[양쯔강]]이 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징한선은 우한 북부인 한커우까지 내려오고 월한선은 우한 남부인 우창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월한선이 개통된 후에는 한동안 두 노선을 페리로 연계하다가, 1957년에 두 철도가 다리로 연결되면서 비로소 두 철도가 하나의 노선으로 통합되어 현재의 [[징광철도]]가 되었다.] 결론적으로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었다. 하나는 기술의 문제였다. 신해혁명이 터진 [[1911년]] 당시 월한선 철도는 광저우에서 광둥성을 못 벗어나고 있었으며 [[후난성]] 창사([[장사]])와 주저우 사이를 연결하는 중간 구간이 1911년에야 간신히 개통되었고 우한에서 창사를 연결하는 구간의 공사가 지지부진 진행되고 있었다. 실제 역사적으로 월한선은 여러 중단을 거쳐 [[1916년]]에 광저우 북쪽 싼수이에서 사오관까지 이어지는 구간이, [[1918년]]에 우한 - 창사 구간이 완성되고 마지막 남은 사오관 - 주저우 구간은 북벌로 [[중화민국 국민정부|국민정부]]가 들어선 [[1929년]]에 이르러서야 공사가 시작되어 [[1936년]]에야 전 구간이 완성되었으며, 중국을 대동맥으로 연결시키겠단 발상은 우한에 양쯔강 철교가 지어지는 [[1957년]]에야 완성되었다. 뭐 이거야 전쟁과 혼란으로 어쩔 수 없다 치고 두 번째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이런 국유화 작업은 각 지방에서 일어나는 민간 자본을 통한 철도 부설과 정면 충돌하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1903년]] 당시 [[사천성]](쓰촨) 총독이었던 석량(錫良, 시량)은 횡선인 쓰촨-한커우('''천한선''') 철도의 부설을 위해 외채가 아닌 민간자본에 의지하자는 의견을 제기했는데 이것을 청 조정에서는 "철로간명장정"으로 철로의 민간부설을 허락하였다.[* 그 전해 이루어진 "공사법"으로 [[주식회사]]란 아이디어도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1905년]] 서태후의 총신 장지동은 후베이, 후난, 광저우의 삼성의 신상회의(상공회의)를 소집하여 월한철도 부설권을 회수하였다. 미국합흥공사에 쿨하게 675만 달러까지 돌려주면서(...) 상인의 주도로 (일부는 관청과 합작하여) 대량의 민간철도가 부설되었다. 게다가 이건 단순히 중국의 유지, 유한계급들의 돈만을 모은 게 아니라 배우나 거지들의 푼돈까지 모인 말 그대로 "민족 자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선회의 입장에서는 이것은 철도를 오히려 망치는 것이었다. 그의 원칙은 "철도는 국력. 그러므로 지분 분할보다는 차관. 차관이라면 내자(민족자본)보다는 외자(外資)."라는 것이었고 실제로 투자 회수가 길고 대량의 자본이 필요한 철도 산업이 국영화가 필요하다는 그의 의견은 일리가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민간주도로 넘어간 뒤 중국의 철도는 더더욱 [[티스푼 공사]]가 된 것이다(학자 이스트먼이나 스펜스의 지적).[*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게 당시 기준으로 보면 동양보다 서양이 기술력에서 절대우위였다. 즉 철도를 빨리 건설하려면 당연히 혼자서 건설하는 것보다는 서구 열강의 기술력을 받아 건설하는게 더 효과적이다. 그런데 철도에 들어간 자본이 전부 내자라면 서구 열강이 뭐가 아쉬워서 철도 건설하는데 기술력을 제공해 주겠는가? 성선회의 생각대로 차관이든 외자든 어쨌든 서구 열강이 여기에 투자한게 있다면 서구 열강도 투자한 게 아까워서라도 자기들 기술력을 조금이라도 제공해 주면서까지 건설하게 해 줬을 것이다.] 그는 장지동을 설득하여 민간 부설권을 회수해 [[1909년]] 독일, 영국, 프랑스 은행의 돈 550만 파운드를 빌려 호광(지금의 후난과 후베이 지방) 철도 차관 계약을 실현했다. 물론 민간의 반대는 심각했고 결국 장지동은 마음 고생 속에 사망했으나, 성선회는 이런 반대에도 철도 국유화의 의지를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런 차에 그가 새 내각의 우선부대신으로 오른 것이었다. 그는 1911년 5월 [[민영화]]된 월한선과 천한선 전역을 국유화하는 것을 조정에 주청하고 조정은 그를 받아들여 직예, 호광 총독을 거친 단푸(단방)를 내려보내 일을 처리하게 했다.[* 조금 뒤의 일이지만 혁명 와중에 단푸는 청나라 신군에게 살해되었다.] 그러나 갑자기 언제 돌려줄지 모르는 국가 보증(공채)만을 남기고 재산이 휴지조각이 된 이들은 가만있지 않았다. 심지어 [[주식]]을 대신한 이 공채들은 '''철도가 완료된 뒤에야''' 보상하기로 되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월한선은 민간이 투자한 자금의 60%만을 돌려주고 40%를 공채로 하였다. 그 40%의 배당금(이자)은 없으며(...) '''완공 후 이익이 난 뒤에야''' 10년에 걸쳐 분할 상환하겠다는 것이다. 천한선의 경우 한 술 더 떠 이미 들어간 돈이 많아 '''돈을 돌려주진 않고''' 5년 이후부터 15년에 걸쳐 분할 상환하겠다고 했다. 정부가 백성(물론 정확히는 지역 세력이지만) 삥을 뜯은 셈.] 여기에 더해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4국 은행단에 600만 파운드를 연리 5%, 40년에 상환하기로 하면서 담보로 쓰촨, 광둥, 후난, 후베이의 염세와 이금, 탄광까지 걸어 버렸으니... 민중들에겐 국유화가 되려 철도를 외세에 팔아먹는 꼴로 인식된 것이다. 게다가 일부 지역(의창(宜昌)에서 만현(萬縣))의 철도 공사는 중단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성선회의 아이디어는 분명 실리적인 측면은 있었을지언정 당시 민심 이반으로 인기가 없고 집행능력이 떨어지는 청나라 중앙 정부의 힘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차관의 경우 역시 30년~40년 동안 외세에게 충분히 갚을 수 있냐는 예측이 그렇게 투명하지만은 않았다.[* 이 차관은 이후 북벌로 수립된 중화민국 국민정부가 채무 승계를 거부하고, 채권자들도 상환받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보아 상환 요구를 포기하면서 사실상 증발하게 된다. 자세한 것은 [[청나라 채권]] 문서 참고.] 성선회는 제대로 된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은 정부가 함부로 실력행사를 할 경우 맞닥뜨리는 반발의 가장 나쁜 예였던 것이다.[* 더욱이 더 큰 문제가 있다면 앞서 말했듯 보상 방식이 너무나 엉망이었다는 거다. 어쨌든 보상만은 쩔어주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면 그거라도 바라보고 기다리는 사람도 나왔겠지만 월한선은 당장 돌려받을 수 있는 자금은 투자액의 60% 수준에 나머지 40%는 당장 돌려받을 수 없으며 거기서 이익을 기대할 수도 없다. 천한선은 당장 아무 자금도 돌려받을 수 없으며 역시 이익을 기대할 수 없다. 이러니 어느 누가 좋아할까? 이는 설령 청나라가 서구 열강에 맞먹는 강대국이었다고 쳐도 발생할 문제다. 물론 진짜 그랬다면 이런 문제가 생겼을 리도 없었겠지만.] ([[http://blog.daum.net/shanghaicrab/16152630|참고 문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