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해혁명 (문단 편집) === 중국 === '''신해혁명을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다루고 있다.''' [[2011년]]에는 신해혁명&중화민국 성립 100주년 기념 영화도 개봉했다. [[http://blog.naver.com/khel3d2oat?Redirect=Log&logNo=130104876881|#]] [[성룡]]이 주연이며 본 항목의 제1혁명까지 다룬다. 대한민국에선 2012년 3월 15일 개봉되었다. 특히 [[중국공산당]]은 신해혁명의 혁명성을 강조하며 농민을 주력군으로 한 인민과 반동 집단과의 투쟁에서 그 의미를 찾았다. 신해혁명은 농민투쟁의 소산이고 이것이 혁명의 기본 동력으로 작용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이들은 거의 예외 없이 '''신해혁명을 중국 현대사의 시발점'''으로 간주하면서 '[[부르주아]] 혁명'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이런 견해가 오랫동안 통설로 자리잡아 왔다. 한편 중국 본토에서는 ''''신해혁명은 [[신사]]층이 자신의 보신을 위해 일으킨 단순한 정권 교체적 정변에 불과하다.''''는 부정적 견해도 존재한다. 대체로 초좌파, 좌익 공산주의[* 쉽게 말해 레닌주의보다 더 좌측이고 [[아나키즘]]보다는 더 우측인 노선.]적인 정세 인식을 반영한 이 견해에 따르면 신해혁명은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반대하는 명확한 강령을 제시하지 못한 채 오히려 열강에 매달리는 듯한 모습을 보였고 기층 민중을 광범하게 동원하지 못했으며 혁명을 끝까지 이끌고 갈 강력한 혁명정당을 형성치 못한 것 등이 논거로 제시되고 있다. [[위안스카이]]를 수장으로 하는 북양군벌의 수립이 그 후과(결과)로 나타났다는 게 이들의 지적이다. 일각에서는 일본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동북 3성]]([[만주]])의 포기를 전제로 [[일본]]과 밀약을 맺었고, [[소련]]의 야욕을 간파하지 못한 채 중국을 팔아넘겼다는 식의 극단적인 평마저 내놓기도 한다. 이에 대해 최초의 공화국 수립에 의미를 두는 긍정론자들도 혁명 발발에도 불구하고 구질서가 그대로 존속되었고 위안스카이의 [[북양정부|공화국 정권]]은 청조보다 더 심한 매판 세력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는다. 당시 [[쑨원]]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혁명 후 그의 회한 어린 언급이 그 증거다. > [[붕괴 후 혼란기|"정치사회적 암흑과 부패가 이전보다 더하고, 인민들의 고통도 나날이 심해졌다."]] 그러나 신해혁명은 기본적으로 안팎의 패망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국가체제를 수립해야 한다는 광범위한 국민적 각성 위에서 성취된 까닭에 이후에 전개된 모든 [[반제국주의]] 투쟁의 선구자 역할을 수행했다. 신해혁명은 당시의 변혁보다 이후의 역사 전개에 주목해 평가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1919년]]의 [[5.4 운동]]은 신해혁명의 후속 혁명 성격을 띠고 있었다. 20세기 전반에 전개된 중국 및 아시아 민중의 반제투쟁 역시 신해혁명의 정신에 부합하는 것이기도 했다. 또 [[천조]]인 청나라의 멸망과 황제라는 자리의 부정, 공화정 체제는 많은 동아시아인들에게 강렬한 충격을 주었다. 일례로 이상주의자로 유명한 [[이시와라 간지]]는 1911년 제 65보병연대가 강제병합한 조선에 진주군으로 배치되어 춘천에 주둔하던 시절 신해혁명 소식을 듣자 부하들에게 그 의의를 설명하고 '''부하들과 함께 "지나 혁명 만세!"를 외쳤다는 일화도 남겼다.'''[* <세계최종전쟁론> 국역본의 보론, '인간 이시와라 간지' 중] 다만 중국 정부 차원에서 [[양안관계]] 개선을 위해 신해혁명에 대해서 호의적인 해석을 내리는 경우도 많다. 엄밀히 말하면 대만으로 이전한 중화민국 정부가 신해혁명의 직접 당사자라고 할 수 있기 때문. [[문화대혁명|중국 문화를 말살 위기로 몰아넣은 이름만 혁명인 후대의 만행]]과는 달리 중국 [[역사]]에서 군주정을 소멸시켰다는 점에서 좋든 싫든 큰 획을 그은 사건임에는 분명하다. 물론 중국 국민의 의식 변화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어떤 의미로는 그 전 세기에 발생했던 [[태평천국의 난]] 제2 라운드라는 관점으로 볼 수도 있다. 신해혁명의 두 주역 중 [[위안스카이]]는 회군을 지휘해 [[태평천국]]과 맞섰던 [[이홍장]]을, [[쑨원]]은 태평천국의 이념 중 일부를 각각 계승했기 때문이다. [[특별행정구]]인 [[홍콩]]과 [[마카오]]에서도 신해혁명을 성대히 기념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