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태영 (문단 편집) == 생애 == 1891년에 한성부에서 태어났으며 1914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으며, 나고야 제3사단 보병 제33연대에서 복무하였다. 1918년 중위로 진급하고, [[시베리아 내전]]에 참전한 뒤 1924년을 전후해 조선 주둔군으로 옮겨간 뒤 1933년경까지 근무하며 소좌까지 진급한다. 1942년 용산정차장 사령관을 역임하는데, 이 과정에서 경성일보에 올린 수기에 "조선인들은 한시바삐 제국의 신민이 되어 동아시아를 개척해야 한다. 내 첫 출진의 목표는 [[야스쿠니 신사]]다."라는 문구가 있다.[[http://m.ohmynews.com/NWS_Web/Event/Premium/at_pg.aspx?CNTN_CD=A0002621430&CMPT_CD=SNEXT|관련 기사]] [[8.15 광복]] 이후 그의 다른 동기생들은 대부분 [[조선경비대]]에 참여했으나, 그는 한동안 참여하지 않았다가 [[여수·순천 10.19 사건|여순사건]]이 터지면서 입대했다. [[1949년]] [[10월]]에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육군참모총장]]자리에까지 올랐으나, [[대한민국 국방부]]의 [[높으신 분들]]과의 의견 충돌로 7개월만에 그만뒀다. [[6.25 전쟁]]에서는 [[전라북도]] 방어를 맡았으나 [[국방장관]] [[신성모]]와의 마찰로 얼마되지않아 해임되었다가 [[1952년]]에야 복직되었다. 예편 후에는 [[이기붕]]의 후임으로 제4대 [[대한민국 국방부장관]]이 되어 휴전협정 직전까지 재임했다. 이후 1959년 서울특별시 성동구 신당동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59040900209103018&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59-04-09&officeId=00020&pageNo=3&printNo=11325&publishType=00010|별세했다]]. 그 뒤 1974년 5월 29일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장돼, 현재 초대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인 [[이응준]]과 함께 제2장군 묘역에 잠들어 있다.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응준]] 역시 '''친일반민족행위자'''다. 일본군 복역 기록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아들과 함께 수록되어있다. 그러나 그런 이력에도 불구하고 [[국립서울현충원]]의 묘비에는 아래와 같이 왜곡 서술 되어 있다. >"개화의 선구자로 호국의 간성이었고, 강직과 청렴으로 시대의 등불이었으며, 덕과 지용으로 국군을 세워 기르셨으니 뜻의 굳으심이 눈바람에 푸르른 청송이시오. 덕의 굳으심이 뭇 봉우리 우뚝한 태산이시라. 높은 뜻 해와 함께 이 땅 위에 머무르시고 빛난 달과 함께 어둠 속의 등불 되시어 조국을 길이길이 비치오소서. 비치오소서."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